신경림 시인 “친일과 월북이 문학성 평가 잣대 돼서야…”

  • 입력 2006년 10월 27일 03시 00분


“우리 사회에는 월북한 시인은 민족적 항일 시인, 남한에 남은 시인은 친일파라는 아주 잘못된 인식이 있어요.”

수화기를 타고 들려오는 신경림(71·사진) 시인의 목소리에는 아쉬움이 묻어났다. 그는 이번 주 발간된 ‘나의 고전읽기’(북섬)에서 시인 정지용을 평가하면서 친일 시인에 대한 우리 사회의 무차별적인 단죄 풍토에 거부감을 드러냈다.

그는 “친일을 한 것이 잘했다는 것은 아니다”고 전제한 뒤 “그때 활동한 예술인 중 친일에 연루되지 않은 경우가 거의 없다는 점을 고려할 때 언제까지나 미당의 시를 친일의 굴레에 가둘 수는 없는 일”이라고 지적했다.

민족문학작가회의 회장, 민예총 사무총장과 공동 상임위원장을 지내는 등 문학계에서 대표적 참여시인으로 평가받는 그의 발언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친일을 했다고 미당 서정주의 작품을 폄훼한다면 과거 정지용을 월북 시인이라고 매도했던 것과 다를 게 뭐냐”며 작품과 과거 행적을 분리해서 평가해야 한다는 점을 거듭 강조했다.

일부 시민단체에서 친일 시인으로 분류하는 청마 유치환에 대해서도 그는 “청마의 시를 두고 친일 운운하는 것은 잘못된 해석”이라고 선을 그은 뒤 “요즘은 친일이다 뭐다 해서 선배 문인들의 흠집을 찾는 데만 혈안이 된 것 같다”고 문단풍토를 꼬집었다.

그는 이어 일부에서 주장하는 북한의 ‘친일청산론’에 대해서도 의문을 제기했다. 북한에서 활동한 이찬과 박승 시인의 경우 친일 행적에도 불구하고 이에 대한 추궁을 받지 않았으며 훗날 박승은 ‘인민 영웅’의 칭호까지 받았다는 것.

“미당의 시를 제대로 평가해 주자”고 주장하는 신 씨지만 미당 작품으로부터 영향을 받았느냐는 질문에는 “전혀 없다. 그의 작품도 잘 읽지 않는다”고 말했다.

시인 정지용의 작품을 우리 시의 고전으로 꼽는다는 그는 “정지용은 월북했지만 김일성·김정일 부자에 대한 찬양시를 단 한 편도 쓰지 않았고 그래서 북한의 문학계에서 어떤 평가도 받지 못하는 잊혀진 존재가 되어 버렸다”고 아쉬워했다.

유성운 기자 polari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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