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연구회는 다음달 3,4일 국립중앙박물관 대강당에서 '동북아시아와 발해'를 주제로 한 제12회 국제학술대회를 개최한다. 한국·중국·일본·러시아 4개국의 발해사 전공자 16명이 참여하는 이번 학술대회의 초점은 역시 발해의 정체성에 모아진다.
중국 측 학자들은 미리 배포된 발제문에서 발해가 고대 숙신과 읍루를 계승한 종족명인 말갈족이 세운 국가로 당에 복속된 지방정권이었다는 주장을 거듭하고 있다.
최근 동북공정의 연구성과로 출간된 '발해국사'의 주저자인 웨이궈징(魏國忠) 전 중국 헤이룽장(黑龍江)성 사회과학원 역사연구원은 "발해의 초기 국호 '말갈'의 재고"라는 발표문에서 말갈은 발해를 건국한 중심종족명인 동시에 초기 국명이라는 주장을 거듭 펼쳤다. 그는 '발해를 세운 대조영이 당나라의 발해군왕 책봉을 받아들인 이후 말갈호칭을 버리고 오로지 발해라고 불렀다'는 신당서 등의 역사기록을 토대로 기존 주장을 반복했다. 그는 또 말갈이 발해에 대한 중국인의 비칭(卑稱)이라는 주장에 대해 대조영의 발해군왕 책봉사였던 최흔(崔¤)의 공식직함에 말갈(靺¤)이 들어간 점을 들어 반박했다.
왕우랑(王禹浪) 중국 다롄(大連)대 교수 역시 714년 여름 최흔이 귀국길에 새겼다는 홍려정란석각(鴻¤井蘭石刻)의 비문과 762년경 세워졌다는 일본 다가(多賀) 성비(城碑)에 '말갈국'이라는 기록이 등장함을 토대로 발해의 초기 국호가 진국(震國)이 아니라 말갈이었다고 강변했다. 그는 진국이야말로 당나라 측천무후가 대조영의 아버지인 걸걸중상을 진국공(震國公)으로 봉했던 타칭(他稱)에서 나온 것이며 오히려 말갈이야말로 발해 구성원들의 자칭이라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고구려연구회 회장인 한규철 경성대 교수는 "말갈은 고구려에서 수도였던 평양성 사람들을 국인(國人)으로 불렀던 것에 대칭해 고구려 변방주민을 부르던 비칭"이라는 점에서 발해를 고구려유민이 세운 국가로 봐야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말갈이라는 호칭이 중국사서에 6세기 갑자기 등장하는데다 그 영역이 숙신과 읍루의 거주지였던 쑹화강 중하류를 넘어 만주 전역과 한반도 북부로 확대됐다는 점에서 그렇다. 따라서 중국사서에 등장하는 7개 말갈족은 6개의 고구려말갈과 1개의 흑수말갈로 구분해야한다는 것이다.
한 교수는 또 "신당서에서 말갈호칭을 버리고 발해라고 불렀다는 기록의 주어는 발해인이 아니라 중국인으로 봐야한다"고 지적했다. 그는 최흔의 직함에 들어간 갈(¤)자는 원래의 갈(鞨)자 보다 더 비하적 의미가 담겼으며 일본 다가성비의 기록은 때로 발해를 비하했던 신라나 당의 분위기가 반영된 산물로 볼 수 있다고 반박했다.
한편 이시이 마사토시(石井正敏) 일본 주오대 교수는 11세기초 문학작품인 겐지모노가다리(源氏物語)에 나오는 '고려인(高麗人)'이 고도의 중국문화를 체현한 발해인을 지칭할 만큼 고구려 계승국으로 발해인에 대한 인식이 일본문화속에 뚜렷했다는 점을 발표한다. 그는 특히 일본 가마쿠라시대 가객으로 유명한 후지와라 테이카(藤原定家·1162~1241)가 필사한 '장추기(長秋記)'란 책의 이면 편지글에서 발해인과 후대의 고려인을 어떻게 구분해야하는가 하는 내용이 담길 정도로 '고려인=발해인'의식이 뚜렷했다고 밝혔다.
권재현기자 confett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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