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바닥까지 겪고 돌아왔죠”…패션계 대모 이신우씨

  • 입력 2006년 11월 2일 02시 56분


흑과 백, 그리고 그레이(회색).

무채색의 대비는 여전했지만 예전 같은 날카로움은 없다. 그 대신 은은한 조화 속에 묻어나는 따뜻한 감성이 모델의 워킹마저 편안하게 감싼다.

한국 패션계의 대모(代母)인 ‘오리지널 리’ 패션디자이너 이신우(65·사진) 씨는 그렇게 우리 곁으로 돌아왔다.

1일 서울 강남구 대치동 서울무역전시장(SETEC)에서 열린 ‘2007 S/S 서울컬렉션’의 오프닝 무대를 장식한 브랜드 ‘시누(CINU)’. 자신의 이름을 건 8년 만의 외출인 때문인지 수십 년 공력을 지닌 노장 디자이너의 목소리는 수줍게 달아올랐다.

“이신우를 기억하는 분이라면 무채색을 강조하는 제 스타일을 한눈에 알아볼 겁니다. 다만 부드러운 선을 통해 인체의 아름다움을 강조한 점이 달라졌습니다. 남성복과 여성복이 대립하기보다는 어우러지도록 배치했지요. 현재의 심정이 많이 반영됐기 때문일 겁니다.”

1960, 70년대에 이미 그는 최고의 디자이너였다. 1994∼95년 파리컬렉션에선 고구려에서 영감을 얻은 작품을 선보여 동서양을 초월하는 전위예술가로 극찬을 받았다. 그러나 “좋은 것만 누려 아픔이 찾아왔을까”. 1998년 외환위기로 부도를 맞은 뒤 모든 것이 무너졌다.

“잘 데가 없어 딸(패션디자이너 박윤정) 작업실에서 쪽잠을 잤습니다. 2년 전엔 남편(박주천 전 한나라당 사무총장)이 쓰러져 산소호흡기에 의지해야 했지요. 나락으로 떨어진 모습을 보고 주위에선 ‘미치지만 말라’고 하더군요. 그때 딸이 저를 수렁에서 건져냈습니다.”

같은 길을 가는 딸은 엄마에게 뭐가 필요한지 알았다. 뼛속까지 디자이너인 이 씨의 복귀를 힘껏 도왔다. 하지만 그는 서둘지 않았다. 딸의 작업을 도우며 몇 년을 보낸 뒤 신인 디자이너의 마음가짐으로 서울컬렉션 무대에 올랐다.

“조급하지 않을 겁니다. 끝까지 떨어져봐서인지 특별한 욕심은 없어요. 창조할 수 있는 긴장감을 맘껏 즐기렵니다. 어떤 시련이 닥쳐도 내 길을 갈 수 있다는 게 얼마나 고마운 일인지 몰라요. 앞으로 지금의 감사하는 마음이 그대로 전달되는 옷을 만들겠습니다.”

정양환 기자 ra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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