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전쟁 휴전 직후인 1953년 10월 국회 본회의.
윤택중(尹宅重) 의원은 ‘학생의 날’(11월 3일) 제정을 건의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동족상잔의 비극을 딛고 나라를 재건할 미래의 기둥은 학생들이고, 그들에게 1929년 광주학생항일운동의 정신을 상기시켜야 한다는 취지. 광주에서 시작돼 전국적으로 194개교 5만4000여 명이 참여한 이 운동은 3·1운동 이후 최대 규모의 항일 시위였다.
이 회의에서는 기념일 명칭에 대한 짧은 토론이 있었다.
“학생의 날이란 명칭이 너무 평범하고 일반적이다. 좀 길더라도 ‘학생항일운동기념일’이라고 분명히 규정하자.”
“학생의 날의 의미는 전 민족적으로 잘 알고 있다. 항일이란 말을 영원토록 쓸 수 있느냐도 생각해야 한다.”
신익희(申翼熙) 국회의장은 표결에 부치면서 “역사적으로 전 민족이 기념할 만한 날, 학생 본심(本心)으로는 영원히 잊지 못할 날, 학생의 날을 제정하자는 것”이라고 말했다.
만장일치 가결.
그러나 ‘그날’은 20년 만에 공식적으로 잊혀졌다. 1973년 정부가 53개 정부 기념일을 26개로 간소화하면서 학생의 날을 폐지한 것.
야당 의원들은 “미묘한 한일관계를 감안한 굴욕적 배려 아니냐” “학생운동을 근원적으로 규제하기 위한 저의가 있는 것 아니냐”고 따졌다.
그러나 정부와 여당은 “그날의 항일독립정신은 3·1절에 묶어서 반영하고, 민족주의적 정의와 애국심은 4·19혁명 기념일에 되새기면 된다”는 희한한 통폐합 논리를 폈다.
학생의 날은 1984년에야 부활했다. 일본의 역사교과서 왜곡이 국민적 분노를 폭발시킨 영향이 컸다. 그 제정 이유는 예전과 다르지 않았다.
“항일독립운동과 반탁, 반공 그리고 6·25 참전과 반독재의 최일선에서 민족정기를 드높였던 우리의 학생들은 민족의 희망이요 나라의 동량입니다.”
그렇다면 같은 해 11월 3일 11년 만에 다시 맞은 ‘학생의 날’ 풍경은 어땠을까. 당시 동아일보 사회면을 들춰 보니….
‘서울시경찰청은 부활된 학생의 날을 맞아 학생들의 시위가 예상돼 전 경찰병력에 비상경계령을 내렸다. 경찰은 3만여 명의 경찰력을 총동원해 가두시위자는 모두 연행토록 지시했다.’
부형권 기자 bookum90@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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