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일 서울대 역사연구소에서 열린 학술대회 '15~19세기 유라시아 제(諸)문명권의 국제질서'에서는 동아시아에서 조공 질서가 갖는 의미를 놓고 열띤 토론이 벌어졌다.
조공 제도란 중국이 소수 주변국들에게만 사절과 예물을 받고 지배권을 보장해주는 대신 나머지 국가들에 대해서는 교역자체를 원천봉쇄하는 폐쇄적 '중화(中華) 블록'을 말한다.
이 때문에 조공은 중국 왕조가 주도한 '동아시아의 패권주의 전략'이라는 평가를 받아왔다.
그러나 이에대해 이태진 서울대 국사학과 교수는 이날 토론회에서 "조공 체제는 중국 주도의 국제 질서가 아니었다"고 정면으로 반박했다. 이 교수는 운석이 지구에 충돌할 때 가져오는 기온 하강이 문명의 교체에 영향을 미쳤다는 '외계충격론'을 주장의 근거로 삼았다.
이 교수에 따르면 운석 출현, 기온 하강, 농업 생산량 급감 등을 야기한 15~19세기 소빙기(小氷期)의 사회불안 속에 중국은 외부와의 광범위한 접촉을 차단해 부가적인 혼란을 막으려했고 그래서 나온 것이 조공 체제와 쇄국정책이라는 것.
조선을 비롯한 동아시아 국가들은 소빙기 충격을 막기 위해 조공을 역이용했다. 중국 왕조와 수교를 함으로써 혼란기에 생길 수 있는 왕권의 약화를 최소화 하려 했던 것이다.
따라서 조공은 소빙기의 충격을 최소화하려는 동아시아 국가들의 공생(共生) 전략이었으며 어느 한 쪽의 일방적인 권위에 의한 것이 아니라고 이 교수는 주장했다.
한편 일본 릿쿄대(立敎大)의 우에다 마코토(上田 信)교수는 '호시(互市)'라는 개념으로 동아시아에 존재했던 경제 질서를 설명했다.
조공을 중국 주도의 '동아시아적 통합경제질서'로 해석한 우에다 교수는 16세기 후반 시작된 호시체제를 조공과 비교해 설명했다. 호시는 중국의 조공을 뛰어넘은 자유무역체제로 일본의 상인들과 중국 상인들이 동남아시아의 항구에서 만든 교역 시스템이다. 호시의 대표적 항구인 베트남의 호이안이나 태국의 아유타야 등에는 일본인 마을이나 중국인 마을이 형성됐을 정도로 무역이 번성했다는 것이 우에다 교수는 설명이다.
우에다 교수는 "'세계제국'을 통해 '세계경제' 시스템을 하나로 묶으려는 시도는 절대 성공할 수 없다는 것을 이미 동아시아의 조공 체제가 보여줬다"며 신자유주의적 경제 흐름에 대해 뼈있는 지적을 하기도 했다.
미국 노스캐롤라이나대의 스프루이트 교수는 조공 체제를 통한 동아시아의 질서체제가 근대 서양과의 경쟁에서 뒤쳐지는 결과를 낳았다고 지적해 눈길을 모았다.
스프루이트 교수는 중세 이 전에 모든 제국이 무너진 유럽은 각 국가가 살아남기 위해 군사·경제적으로 치열한 경쟁을 벌였고 대포·총포의 발달이나 신대륙 발견도 생존 경쟁의 산물이었다는 것.
스프루이트 교수는 "동아시아는 중국이라는 제국 아래 경쟁 없이 안정된 질서가 19세기까지 지속되면서 각 국가의 발전 계기가 형성되기 어려웠다"고 지적했다.
유성운기자 polari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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