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노의 세계에서 화장품으로
그는 최근 아토피용 화장품 아토시스를 개발했다. 아토피 치료에 효과적인 필수지방산을 무기나노캡슐에 넣은 제품이다. 1월에는 비타민 C를 나노 크기의 초미립자에 담은 ‘FM 24’를 내놓았다.
비타민 C나 필수지방산은 안정화된 물질이 아니기 때문에 피부로 전달되는 과정에서 대부분 파괴된다. 나노캡슐은 피부의 세포보다 작아 이 기술을 이용하면 유익한 성분을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다.
그가 처음부터 화장품 개발을 염두에 둔 것은 아니다. 특정 조직이나 세포만을 공격하는 ‘스마트 폭탄형’ 암 치료제 개발이 최종 목표다. 화장품은 이 연구 과정에서 나온 부산물인 셈이다. 시제품이 나온 뒤 최 교수와 연구원들이 직접 실험 대상이 됐다.
“우리의 기술을 믿지만 스스로 납득할 수 있을 정도의 믿음과 신뢰가 필요했다. 화장품을 바르는 것은 과거에는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지만 막상 해 보니 큰일도 아니더라.(웃음)”
○ 코끼리 밥솥의 충격
그래도 과학자와 화장품은 어색한 조합이 아닐까. 이에 대해 그는 30여 년 전 일제 ‘코끼리 밥솥’으로 받은 충격을 소개했다. 1970년대 중반 일본에서 공부할 때의 경험이다.
“도서관에서 전기밥솥에 관한 특허 목록을 우연히 봤습니다. 솔직히 밥이야 쌀을 솥에다 안치고 잘 끓이면 되지 거기에 무슨 기술과 특허가 필요하냐고 생각했죠. 하지만 일본의 내로라하는 대기업조차 밥솥과 관련된 특허를 20개 이상 냈더군요.”
일본의 기초과학에 대한 엄청난 투자와 세계 최고 수준의 연구시설도 확인했다. 국내에서는 변변한 연구소가 드물던 시절이다. 당시 정권은 극일(克日)을 주장했지만 젊은 과학자는 큰 충격을 받았다. 과학자가 연구에만 몰두해서는 도저히 세계 수준을 따라잡을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의 불안한 예감은 그대로 맞아떨어졌다. 1980년대 일본을 다녀오는 여행객들 사이에서는 코끼리 밥솥을 들고 오는 게 하나의 유행처럼 번져 사회문제가 됐다. 이제는 그 밥솥이 얼굴에 잠시 붙였다 떼는 데 2만 원이나 드는 ‘SK-Ⅱ’의 마스크 팩으로 바뀌었을 뿐이다.
그는 독일 유학을 거쳐 31세에 서울대 조교수가 됐다. 야심만만한 소장학자를 기다린 것은 아무런 실험 설비도 없는 3평의 텅 빈 공간. 학자로 대성하겠다는 꿈은 컸지만 현실은 녹록하지 않았다. 4년간 논문 한 편 쓰지 못한 채 허송세월한 뒤 이민을 생각했다.
“그때 극일을 다짐했던 초심(初心)을 떠올렸습니다. 월급의 절반을 털어 청계천에서 부품을 사들여 조립한 뒤 비로소 연구를 시작했죠.”
연구 인력이 부족한 한국 현실에서 과학자는 기초 이론은 물론 응용기술 개발에도 힘써야 한다는 것이 변함없는 신념이다.
○ 21세기의 연금술
그는 1980년대 후반부터 나노 기술에 매달리기 시작했다.
“당시 기초과학에 대한 지원 수준은 소형차가 비포장도로를 덜컹거리며 달리는 것과 비슷했습니다. 아우토반에서 씽씽 달리는 벤츠나 페라리와는 경쟁할 여건이 아니었죠. 하지만 나노라면 비슷한 시점에서 출발해 경쟁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나노의 세계는 하루가 다르게 진화하고 있다. 한국과학기술정보연구원은 △양자 칩을 이용한 DNA 분석(5∼10년 후) △돌아다니며 혈관 수술을 하는 나노 로봇 개발(30∼50년 후) △장기가 손상된 냉동인간 소생(50년 후) 등을 예측하고 있다.
“나노 기술은 21세기의 연금술입니다. 중세 연금술사가 그 비밀을 모른 채 경험했다면 현대에서는 원리를 알고 접근하는 셈이죠. 나노 기술은 생명공학기술(BT) 정보기술(IT)과 결합해 ‘기적’을 만들어 낼 수 있습니다.”
관점에 따라 세계가 달라진다는 말은 맞다. 그는 ‘지구를 탁구공 크기로 줄인 세계’에 살고 있다.
김갑식 기자 dunanworld@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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