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이 흔히 접하는 위스키의 대부분은 블렌디드 위스키다. 발렌타인, 로얄살루트, 조니워커, 커티 샥 등이 모두 그렇다. 블렌디드(blended)란 말은 원액인 몰트 위스키에 값이 싼 그레인 위스키를 섞는다고 해서 붙은 것이다.
관광객으로 붐비는 에든버러성 앞에서는 큰 위스키 상점인데도 블렌디드 위스키를 볼 수 없었다. ‘왜 블렌디드 위스키가 없느냐’고 묻자 이런 대답이 돌아왔다. “몰트 위스키가 있는데 왜 블렌디드 위스키를 찾죠?”
목적지는 에든버러에서 자동차로 4시간 정도 걸리는 스코틀랜드 동북해안의 테인. 이곳에서 ‘테인의 16인’으로 불리는 전통 양조인들이 글렌모렌지라는 몰트 위스키를 만든다. 테인을 택한 이유는 글렌모렌지를 보유한 회사가 서북해안 아일레이 섬에서 나는 몰트 위스키 ‘아드벡’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몰트 위스키를 마신다는 것은 위스키의 개성을 맛보는 것이다. 맛이 똑같은 몰트 위스키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특히 아드벡의 거칠고 스모키(smoky)한 맛과 글렌모렌지의 섬세한 향의 층이 느껴지는 맛은 특히 극명한 대비를 이룬다.
블렌디드 위스키의 맛이 별로라고는 절대 말할 수 없다. 하지만 부드럽게 목을 타고 넘어가는 맛만 추구해 숙성 기간을 극대화하다 보니 개성을 잃기 쉬운 건 사실이다. 사람도 그렇지만 술도 늙으면 다 비슷해지는 법이다.
개성은 몰트 위스키, 그중에서도 싱글(single) 몰트 위스키에서 순수하게 구현된다. 한 증류소에서 나온 원액만으로 만든 게 싱글 몰트 위스키고, 여러 증류소의 원액을 섞으면 퓨어(pure) 몰트 위스키다. 아드벡과 글렌모렌지는 싱글 몰트 위스키다.
시음장에서 아드벡 10년과 글렌모렌지 10년짜리를 한 잔씩 마주하고 앉았다. 몰트 위스키 10년은 블렌디드 위스키 12년, 몰트 위스키 15년은 블렌디드 위스키 17년에 대응한다. 블렌디드 위스키는 숙성 기간을 몰트 위스키보다 2년씩 늘린다.
몰트 위스키 10년과 15년 중에 하나를 택해야 한다면? ‘테인의 16인’ 중 하나인 양조장 관리인 그레이엄 은선 씨는 “몰트 위스키의 기준은 10년이다. 10년을 맛본 다음에 15년이 있다”고 말했다.
몰트 위스키의 완고함을 따르다 보면 손은 15년짜리보다 10년짜리에 먼저 간다. 몰트 위스키도 30년까지 만들지만 양 자체가 적다. 순함을 얻는 대신 개성을 잃게 될까봐 망설여지는 모양이다.
몰트 위스키의 맛은 몰트 자체에 의해 좌우된다. 흔히 몰트라고 부르는 것은 정확히는 몰티드 발리(malted barley)를 말한다. 보리를 물에 담가두면 싹이 나기 시작하면서 단백질이 전분으로 변하는데 이 상태에서 5일가량 둔다. 그 다음 마루에 펼친 뒤 가마에 불을 지펴 말리면 발아가 중단된다. 이때 가마에서 이탄(석탄의 일종)을 태워 특유의 향을 가미한다.
10월 말 스코틀랜드는 가을에서 겨울로 접어드는 길목에 있었다. 글렌모렌지의 게스트하우스에서는 도녹 만의 바다가 보인다. 오는 날부터 비가 흩뿌렸다. 아침에 바다를 가까이 보고 싶었다. 카운터 직원은 바다로 가는 길은 따로 없다고 했다. 웰링턴 부츠라고 불리는 고무장화를 빌려 신고 게스트하우스에서 바다까지 500m 정도의 질척한 풀밭 길을 걸어갔다.
기다리고 있는 것은 맥베스의 음산한 분위기가 느껴지는 바다. 물색은 잔뜩 인상을 찌푸린 하늘색과 똑같아 수평선을 그어볼 수도 없었다. 맥베스를 유혹한 그 마녀가 이번에는 물속으로 뛰어들라고 유혹하는 듯했다. 뒷걸음치듯 서둘러 게스트하우스로 돌아와 글렌모렌지 위스키 한잔을 들이켰다. 그제야 비로소 벽난로에 불이 지펴진 듯 아늑한 느낌이 생겨났다.
테인(스코틀랜드)=송평인 기자 piso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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