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 씨의 연임을 반대하는 노조원 20여 명이 그의 면접장 입장을 막으려 하자 경찰 100여 명이 그들을 밀쳐 내면서 소란이 일었다. 경찰의 경호를 받으며 들어가는 정 씨를 향해 노조원들은 “낙하산 사장 물러나라”고 외쳤다.
KBS 노조가 4월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정 씨의 연임에 반대하는 직원이 82%가 넘었지만 정 씨는 임기 만료 후 연임을 고집하다가 공개 망신을 당한 셈이 됐다. KBS 이사회는 이날 정 씨의 임명 제청을 강행했으나 그 후폭풍으로 3명의 이사가 사퇴하고 노조는 “이사회가 사장후보추천위원회의 절차를 무시했다”며 법정 대응을 할 태세다.
이처럼 직원들의 야유 속에 돌아오게 될 정 씨를 보면서 박수 받고 나간 그레그 다이크 BBC 전 사장이 생각났다.
다이크 전 사장은 2000년 1월 BBC 사장에 취임해 관료주의로 병들었던 거대 공영 방송사를 개혁했다. 그는 영국 정부가 이라크 대량살상무기 정보를 부풀렸다는 의혹을 제기한 보도로 갈등을 빚은 끝에 2004년 초 BBC 경영위원회로부터 돌연 해임 통보를 받았다.
놀라운 일은 그 직후 벌어졌다. 3000여 명의 직원이 거리로 나와 ‘그레그를 복귀시키라’는 피켓을 들고 시위를 벌였고 주머니를 털어 일간지 ‘데일리 텔레그래프’에 전면 광고를 게재했다. ‘BBC의 독립’이라는 제목의 광고는 이랬다.
‘그레그 다이크는 진리를 추구하는 데 두려움이 없는 BBC 저널리즘의 상징이었다.… 우리는 갑작스러운 그레그의 사임으로 낙심했으나 누구보다 대중에게 봉사하는 독립 조직을 만들려고 애쓴 그의 업적과 비전을 지켜 나가기로 결의했다.’
경찰의 경호로 면접을 치른 끝에 연임에 성공한 정 씨와 “여권의 각본대로 거수기 역할을 했다”고 비난받는 이사들에게 다이크 전 사장의 자서전 ‘BBC 구하기’를 권해 주고 싶다. 직원들과 한몸이 되어 개혁을 이루고 정치로부터 BBC의 독립성을 지킨 일화들이 기록돼 있다. 공영방송 사장은 임명권자가 아닌, KBS 구성원과 시청자들에게 책임지는 자리임을 상기했으면 한다.
이진영 문화부 ecol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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