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단 출연진이 호화스러웠다. 엘리자베트 그뤼머(백작부인), 에리카 쾨트(수잔나), 게르트 펠트호프(피가로), 하인리히 홀라이저(지휘자)라는 일류 음악가에다가 솔리스트, 합창단, 오케스트라, 스태프, 기술진 등 180명이 초청된 초대형 이벤트였다. 이런 수준의 공연은 현재도 대단히 어렵다.
공연은 여러 에피소드를 낳았다. 시민회관 스팀 파이프가 터져 의상이 물에 젖고 성악가들이 감기에 걸려 위기에 빠졌으나, 출연진이 긴장을 하고 공연에 임해 놀랄 만큼 아름다운 음악을 선사했다고 한다. 다음 날 코리아타임스는 ‘기절할 것 같은 대성공’이었다고 평했다. 소설가 박경리 씨도 한국일보에 그날의 벅찬 감동을 자세히 기록했다(참고로 많은 사람의 노력이 있기에 가능했지만 공연이 성사되고 성공을 거두는 데는 최정호 현 동아일보 객원 대기자·大記者의 공이 컸다).
가난했지만 고품격 오페라 관람
필자는 나이가 어려 보지 못했지만, 중학시절 음악서적을 읽다가 이 공연에 대해 자세히 알게 됐다. 재미있는 사실은 공연을 위해 피 같은 외화를 한 푼도 쓰지 않았다는 점이다. 세계 최빈국 중 하나였던 한국을 배려해 서독 외교부가 경비를 부담하고 한국이 단원 체재비만 부담하는 파격적인 계약을 했다. 1인당 80마르크(당시 환율로 20달러)에 불과한 단원 체재비를 지불하거나 바꿔 줄 외화가 없어서 원화로 지불하고 그 돈을 한국에서 다 쓰는 조건을 한국이 제시했고, 서독이 사정을 이해하고 수용했다.
최상급 성악가가 당시 받던 하루 출연료가 5000달러였으니 공연을 한국이 정상적으로 유치할 수 없었다. 한국 경제는 1인당 국민소득이 가까스로 100달러를 넘어섰고 수출이 2억5000만 달러인 참담한 수준이었는데, 이 수치조차 이전보다 많이 좋아진 것이었다. 1964년 12월 박정희 대통령이 뤼프케 대통령의 초청으로 서독을 방문했을 때 외화를 벌려고 파견했던 광원, 간호사를 만나 눈물을 흘린 사실은 잘 알려졌다. 대통령 전용기가 없어서 서독 루프트한자 비행기를 이용했던 것도 지금 젊은 세대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리라.
한국인은 음악을 유난히 사랑한다. 대중음악은 물론 고전음악 팬 층도 상당히 두껍다. 나는 40년 전의 공연을 생각하면서 윗세대의 노력이 모여 한국문화계의 탄탄한 저변이 닦였다고 믿는다. 못살아도 예술을 사랑하는 애호가가 많았기에 한국 문화예술의 발전이 가능했다.
우리는 이제 전혀 달라진 환경에서 살고 있다. 유명 연주자, 오페라단, 오케스트라가 한 해에도 여러 번 오며, 그들의 출연료와 체재비를 못 낼 걱정도 없다. 얼마 전 축구스타 차범근 씨는 한 칼럼에서 풍요와 여유를 누리는 지금의 젊은 세대가 부럽지만 그런 세상을 “그들에게 물려준 우리 세대가 자랑스럽다”고 했다. 선대(先代)의 열정과 노력이 경제적 풍요뿐만 아니라 문화적 풍요의 기반을 다음 세대에 선사했던 것이다.
선대의 노력 공정히 평가해야
한국의 젊은이는 이런 풍요 속에서도 행복해 보이지 않는다. 그들의 고통은 이해할 만한 부분이 많다. 영화화된 에이미 탄의 소설 ‘조이 럭 클럽’에서도 딸 세대는 불만에 가득 차 있다. 그러나 탄은 이들 젊은이의 어려움과 그들 어머니 세대가 살아남기 위해 겪었던 엄청난 고난을 극적으로 대비해 놓고 있으니, 2대의 아픔은 나름대로 심각하지만 1대가 겪은 형극(荊棘)에 비하면 너무나 하찮아 보인다.
선대를 무조건 찬양하라는 얘기가 아니다. 그러나 그들이 가져야 했던 시대적 한계와 도전, 극복하려는 노력, 그 대가로 아래 세대가 받은 여러 긍정적, 부정적 유산을 이제는 공정하게 그리고 성찰적으로 평가할 시점이 온 것 같다는 얘기다.
강규형 명지대 교수·현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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