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발간된 H출판사의 위인전집에는 올해 1월 타계한 비디오 아티스트 백남준 씨를 비롯해 ‘흥행의 귀재’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 브라질의 축구영웅 펠레, 영국의 물리학자 스티븐 호킹 박사, 티베트의 종교 지도자 달라이 라마 등이 포함돼 있었다.
“모두 훌륭한 인물이죠. 하지만 대부분 살아있는 데다 영화감독과 축구선수 등 대중 스타까지 위인으로 선정했다는 사실이 놀랍기도 하고 신선하기도 하더군요.”
이 씨가 초등학생이던 20여 년 전엔 위인전 목록이 어느 출판사에서 나온 것이든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한국인물로 세종대왕과 이순신 장군은 ‘꼭 끼는’ 위인이었고, 외국인물 중에는 발명왕 에디슨과 미국의 링컨 대통령이 고정 멤버였다. 여성 위인으로는 신사임당과 헬렌 켈러, 퀴리 부인이 항상 목록의 앞에 있었다.
어느 경우든 위인이 되려면 살아 있지 않은 ‘역사 저편’의 사람이어야 했고, 인류 문명이나 한국사에 큰 업적을 남겨야 했다.
○21세기의 위인은 스팅과 티나 터너, 박지성?
위인전집이 바뀌고 있다. 성군(聖君)이나 장군이 위인전 목록의 앞 순서를 차지했던 것은 옛날 얘기다. 권력을 쥐고 세상을 호령했거나 전 인류에 영향을 끼친 사람들만을 위인이라고 하기에는 ‘성공’의 기준이 너무나 달라진 것이 반영됐다
2002년 G출판사가 펴낸 어린이 위인전집, ‘세계를 이끄는 사람들’에는 팝 스타가 대거 포함됐다. ‘비틀스’ 멤버 존 레넌, ‘로큰롤의 여왕’ 티나 터너, 엘튼 존과 스팅이 모두 위인으로 꼽힌 것. 빌 게이츠 마이크로소프트 창업자와 조립완구인 ‘레고’를 만든 갓 프레드, 소니의 창업주 아키오 모리타, 패션 디자이너 코코 샤넬 역시 이름을 올렸다.
요즘 청소년들은 어떤 사람을 위인이라고 생각할까?
서울 양천구 신정동의 목일중학교 1학년인 주예원(13) 양은 가장 존경하는 인물로 주저 없이 축구스타 박지성(25) 선수를 꼽는다.
주 양은 축구에 큰 관심이 없다. 박지성 선수에게서 보는 것은 ‘인생’이란 경기장에서 자신의 자리를 찾아 뛰고 또 뛰는 한 선수의 모습뿐이다.
“박지성은 평발이지만 그라운드에선 그야말로 ‘산소 탱크’잖아요. 자신의 단점을 극복하고 최고의 선수로 인정받기까지 얼마나 많은 노력을 했겠어요.”
신정동 은정초등학교의 장태진(52) 교사는 “요즘 아이들은 TV나 인터넷 등 다양한 매체를 통해 많은 인물을 접하기 때문에 어떤 사람이 위인인가에 대한 제 나름의 기준도 다양하고 위인의 범주에 대한 인식의 폭도 넓다”고 말했다.
○세종대왕은 빠지고 안철수는 들어가고
과거와 요즘의 위인전 독서 경향을 보면 위인관의 변화를 더욱 뚜렷하게 볼 수 있다.
24년 전인 1982년 11월 동방생명(현 삼성생명)은 초중학생 6만8814명을 대상으로 가장 많이 읽은 위인전 순위를 매겼다.
초등학생은 1위 이순신, 2위 세종대왕, 3위 에디슨, 4위 퀴리 부인, 5위 신사임당이었다. 중학생 역시 순위에 차이가 있을 뿐 인물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렇다면 올해 1월부터 올해 10월까지 인터넷 서점 ‘알라딘’에서 가장 많이 팔린 어린이 위인전은 무엇일까? 정답은 ‘루이 브라이’다. 어른들에게는 생소한 인물인 브라이는 3세 때 송곳을 가지고 놀다가 눈을 찔리는 사고로 시력을 잃은 뒤 14세 때 알파벳 점자를 만든 인물. 입소문으로 베스트셀러가 됐다.
이 기간 알라딘이 집계한 어린이 위인전 베스트셀러에선 컴퓨터 의사 안철수, 생물학자 최재천 씨 등의 삶을 다룬 ‘나는 무슨 씨앗일까?’(2위), ‘거미 박사 남궁준 이야기’(3위), ‘옥수수 박사 김순권 이야기’(5위) 등 생존인물의 전기가 높은 순위를 차지했다.
그러나 1982년 조사 때 포함된 위인들의 전기는 알라딘 베스트셀러 20위 안에서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출판 칼럼니스트인 한미화 씨는 “신격화된 인물이 아닌 동시대 인물을 통해 자신의 꿈과 진로를 구체화할 수 있다는 점에서 위인이 다양화되는 현상은 긍정적”이라고 평가했다.
하지만 이이화 역사문제연구소 고문은 “한 사람을 전체적으로 평가하기 위해서는 사후(死後) 어느 정도 시간을 두고 충분한 검증을 해야 한다”며 “위인전이 상업주의에 영합해선 곤란하다”고 위인전의 다양화에 대해 우려를 나타냈다.
이재명 기자 egija@donga.com
조은아 기자 achim@donga.com
세상이 변해도 ‘불멸의 이순신’
지난 20여 년간 위인전에 등장하던 여러 인물들이 명멸했지만 꿋꿋이 자리를 지키는 이도 있다. 바로 이순신(사진)이다.
이순신 전기는 1982년 11월 조사 때 초등학생 1위, 중학생 5위를 차지했다. 23년이 지난 2005년 알라딘 베스트셀러 순위에서도 이순신의 위인전은 9위(이순신을 만든 사람들)와 12위(이순신)에 올랐다.
과거 위인전에서 이순신의 모습은 온갖 시련을 겪으면서도 불굴의 의지로 부활하는 ‘난세의 영웅’이었다. 그러나 2004년 10월 나온 ‘이순신을 만든 사람들’에서는 이순신보다 거북선을 만든 나대용, 조선 최고의 해전(海戰) 전문가인 정걸, 화약 전문가인 이봉수 등 주변 인물이 앞서 소개된다. 이름 없는 이들이 이순신을 만나 자신의 능력을 마음껏 펼쳐 보이게 됐다며 이순신의 영웅성보다 리더십에 초점을 맞췄다. 이순신과 대조되는 인물은 세종대왕이다.
1982년 조사 때 초등학생 사이에서 2위, 중학생 사이에서 1위의 위인이었던 세종대왕은 2005년 순위에서는 찾을 수 없게 됐다.
세종대왕의 위대함에 대한 평가가 달라졌다기보다는 ‘인기 순서’에서 밀렸다는 것이 교사들이나 출판계의 평. 여기에는 TV 드라마 등 대중매체의 영향이 크다.
이순신의 경우 지난해 KBS에서 방영돼 크게 인기를 끈 ‘불멸의 이순신’ 등을 비롯해 TV 드라마에서 몇 해에 한 번씩은 다루어지며 대중적인 노출이 이뤄졌다. 이에 비해 세종대왕은 최근 사극 드라마의 소재로 이렇다 하게 다뤄지지 않았다. 고난과 시련보다는 ‘흠 없는 업적’으로 일관된 삶을 살아 “위대하기는 하지만 재미있지는 않다”는 것이 외면당한 이유였다. 이재명 기자 egij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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