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가니스탄의 탈레반 정권은 1998년 11월 20일 이같이 발표했다. 손님이란 다름 아닌 알 카에다의 수괴 오사마 빈 라덴.
미국이 아프리카 미국대사관 폭탄 테러의 배후로 빈 라덴을 지목하고 신병 인도를 요구한 데 대한 탈레반의 최종 답변이었다.
미 대사관 폭탄 테러는 그해 8월 동아프리카의 탄자니아와 케냐의 수도 다르에스살람과 나이로비에서 동시에 일어났다. 미 대사관을 향해 돌진한 폭탄 적재 차량은 미국인과 아프리카인 257명의 목숨을 앗아갔고 부상자도 4000여 명에 이르렀다.
알 카에다 조직원들이 벌인 이 사건으로 빈 라덴은 ‘테러리즘의 화신’이란 딱지와 함께 국제적 인물로 떠올랐다. 미 연방수사국(FBI)은 전직 알 카에다 조직원들의 법정 증언과 위성전화 통신기록을 근거로 빈 라덴을 1급 수배자 명단에 올렸다.
그러나 빈 라덴은 이미 이슬람 세계에서 ‘지하드(성전)의 영웅’이었다. 특히 탈레반엔 더욱 각별한 국빈급 손님이었다.
사우디아라비아의 백만장자 아들로 태어난 빈 라덴은 1980년대 아프가니스탄에서 소련 점령군에 맞서 싸웠고 소련군 철수 이후에도 한낱 게릴라 집단에 불과했던 탈레반이 정권을 잡도록 무기와 자금을 제공했다.
1996년 수단에서 추방당해 아프가니스탄으로 온 빈 라덴은 즉시 알 카에다와 탈레반의 동맹을 결성했다. 알 카에다 하부조직 ‘055여단’을 탈레반군에 통합시켰고 그의 아들 중 하나를 탈레반 최고지도자 모하메드 오마르의 딸과 결혼시키기도 했다.
탈레반 정권이 그런 은인(恩人)을 쉽게 내줄 리 만무했다. 미국은 급기야 빈 라덴이 숨어 있는 것으로 알려진 아프가니스탄 동부 지역에 순항미사일을 발사하며 압박했다. 하지만 탈레반은 끝내 미국의 요구를 거부했고 얼마 뒤엔 “행방불명 상태”라고 공식 발표했다.
2001년 9·11테러 이후에도 탈레반은 미국의 요구에 3년 전과 똑같은 방식으로 대응했다. 미국의 최후통첩에도 불구하고 ‘증거가 없다’며 빈 라덴을 끝까지 비호했다. 하지만 이번에 그 대가는 컸다. 미국과 영국의 군사공격 1개월 만에 탈레반 정권은 완전히 몰락했다.
그로부터 5년, 탈레반은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 접경을 넘나들며 게릴라 전쟁을 계속하고 있다는 소식이다. 아프가니스탄 각지에서 탈레반과 그 동조세력의 테러 공격이 계속되고 있지만 탈레반의 재기는 요원해 보인다.
이철희 기자 klim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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