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재로 알려진 다산 정약용도 사진에서 순간포착의 기술만큼은 끝내 터득하지 못했던 걸까. 다산 정약용의 '시문집' 1집 10권 설(說)문에 나오는 이 내용은 조선 최초의 사진 기술 기록의 일부분이다.
다방면에 뛰어난 실학자로 알려진 다산은 '칠실관화설(漆室觀畵說)'이란 사진 기술의 이론을 남겼고 이를 바탕으로 제작한 기계를 칠실파려안(漆室玻瓈眼)이라 명명했다. '칠실'은 암실, '파려안'은 렌즈를 일컫는 당시 단어로 '카메라 오브스쿠라'의 순수한 우리식 명칭인 셈.
"어느 맑은 날 방의 창문을 모두 닫고 외부에서 들어오는 빛을 모두 막아 실내를 칠흑과 같이 하고 구멍을 하나만 남겨 애체(靉靆·볼록렌즈)를 그 구멍에 맞추어 끼운다. 투영된 영상은 눈처럼 희고 깨끗한 종이 판위에 비친다."
실험 결과가 성공이었는지 다산은 "세밀하기가 실이나 머리털과 같아 중국의 화가 고개지(顧愷之)도 능히 그려낼 수 없을 것이니 무릇 천하의 기이한 풍경이다"고 기록했다.
전시회를 마련한 사진작가 최인진(65) 씨는 1970년대 초 '여유당전서'에서 '칠실관화설'을 처음으로 발견했다. 5년에 걸친 고증 작업 끝에 1979년 서울시사편찬위원회가 발간한 '향토서울'에 '조선조에 전래된 사진의 원리'라는 제목의 연구논문도 냈다.
21세기 사진작가 최씨는 18세기 다산의 기술을 어떻게 평가할까.
"일반 사진과 달리 광선이 풍부해야만 사물이 선명하고 뚜렷하게 보입니다. 그리고 남에서 북을 봐야 해를 등지기 때문에 선명하고요. 또 물체가 너무 가까우면 명도가 너무 강해 물체가 정확히 안 보이더군요."
아쉬운 점은 현존하는 다산의 작품이 한 점도 없다는 것. 다산은 이 기술을 활용해 교우 이기양의 초상화를 그리게 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우리에게 남은 것은 '여유당전서'의 기록뿐 이다.
유성운기자 polaris@donga.com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