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약소국이 중립을 표방하면서도 주변 강대국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처지를 의미하는 조어(造語)다. 1960∼70년대 서독의 정치논쟁에서 비롯된 이 말은 핀란드가 옛 소련에 거스르지 않는 비자주적 외교정책을 편 것을 빗댄 것이다.
핀란드인에겐 모욕이 아닐 수 없다. 강대국의 틈바구니에서 주권을 지키기 위해 그럴 수밖에 없었던 시대적 상황을 무시한 것이라는 항변이다. 특히 ‘핀란드화’의 시작인 겨울전쟁(Winter War)을 살펴보면 그 억울함을 이해할 만하다.
1939년 11월 30일. 소련 적군(赤軍)은 46만 병력을 투입해 핀란드 국경을 밀고 들어왔다. 1000여 대의 소련군 항공기가 수도 헬싱키를 무차별 공습했다. 핀란드가 독일의 소련 침공 루트가 될 것을 우려한 일종의 예방 전쟁이었다.
소련군은 ‘누워서 떡 먹기’로 생각했다. 일부 병사는 스칸디나비아의 혹독한 겨울 날씨에도 불구하고 여름철 군복을 걸치고 왔다. 야외 전투 없이 어디든 점령해 따뜻한 실내에서 지내게 될 것이라는 생각에서였다.
하지만 핀란드인의 저항은 거셌다.
소규모 스키부대와 자전거부대가 숲 속에 매복해 게릴라식 공격에 나섰고 레지스탕스의 화염병 공격도 시작됐다. 화염병은 이때부터 소련 외교장관의 이름을 따 ‘몰로토프 칵테일’로 불렸다.
핀란드의 저항활동은 한때 전 세계 언론의 헤드라인을 장식했다. 각국의 지원이 쇄도했고 외국에 나갔던 핀란드 이민자는 물론 외국인들까지 자원병으로 참전했다.
소련군의 실패는 자만과 무능에서 비롯됐다. 소련군은 아무 준비도 없이 병력의 우위만 믿었던 것. 소련군 1개 사단이 핀란드 소부대의 매복공격에 의해 거의 대부분의 병력(2만3000명)을 잃은 ‘라텐티에 사건’은 지금도 군사학에서 해서는 안 될 대표적 실수로 꼽힌다.
하지만 겨울을 넘기면서 주변국의 지원은 시들해졌다. 독일과 스웨덴 등 주변국은 핀란드에 정전 협정을 맺도록 압력을 가했고 핀란드군의 탄환도 바닥이 났다. 결국 1940년 3월 6일 핀란드는 정전협정에 서명할 수밖에 없었다.
4개월간의 전쟁 동안 소련군은 최소 12만7000명이 사망했다. 핀란드군의 희생자는 2만7000명에 불과했다. 핀란드의 명백한 군사적 승리였다.
그러나 최종 결과는 가혹했다. 핀란드는 영토의 10%를 소련에 넘겨야 했고 일부 요충지를 소련의 군사기지로 장기 임대해 줘야 했다. 약소국의 설움이었다.
이철희 기자 klim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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