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연(54·사진) SADI(삼성 아트앤드디자인 인스티튜트) 교수의 그림에는 ‘한국의 자연’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마티에르도 그렇고 평면에 형상화한 기호(대나무 산 연잎 구름)도 그렇다. 한국적 소재를 탐구하는 작가가 많지만 이 교수는 유별나게 소재와 조형에서 “플라스틱 문명을 거부하는 수더분한 촌색시처럼 우리의 자연을 파고들고 싶다”고 말했다.
박영덕 화랑에서 8∼17일 열리는 5년만의 개인전에서는 자개를 더했다. 이 교수는 “자개는 오랫동안 습작으로 해오다가 이번에 선보이게 됐다”며 “자개는 영어로 ‘마더 오브 펄’인데 진주를 출산하는 고통이 마침내 영롱한 빛으로 승화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말했다. 전시작 20여 점에서 자개는 꽃잎 대나무 등 다양한 기호로 형상화된다. 자개를 다루는 방법은 재래시장의 장인들에게서 배웠다.
이 교수의 작업은 오랜 시간 ‘손질’로 이뤄진다. 삼베에 몇 차례 옻칠을 한 뒤 이미지를 넣거나 한지 위에 삼베를 덮어 그 위에 형상을 그려 넣는다. 색칠은 먹 흙 숯가루 등 천연 재료를 손가락에 묻혀 한다. 그림은 토담집의 흙벽처럼 질박해 도시인들이 뿌리칠 수 없는 자연의 정서를 풍긴다. 시각적인 현란함을 배제하고 어눌하면서도 넉넉한 여백의 미를 강조한 점도 특징.
그는 서울대에서 동양화를 전공한 뒤 미국 뉴욕 프랫 인스티튜트에서 회화와 판화를 전공했다. 동양화를 하면서 왜 유학을 가느냐고 말리는 사람이 많았지만 그는 “정형화된 동양화의 틀을 벗어나 날고 싶었다”며 “10여 년간 현지에서 마음껏 활동하다 보니 어느새 다시 동양화의 품으로 들어와 있었다”고 말했다. 1987년 뉴욕에서 첫 개인전을 연 뒤 미국 유럽에서 활동했고 시카고 샌프란시스코 시드니를 비롯한 여러 아트 페어에서 주목받았다.
이 교수는 디자인 전문 학교인 SADI에서 기초 드로잉을 강의하고 있다. 디자이너들도 번뜩이는 아이디어를 손으로 형상화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손질의 무한한 반복을 통하면 자기 내면의 세계가 저절로 형상을 갖추게 됩니다. 기초가 튼튼하면 열린 마음으로 온갖 이질적인 것들의 조화를 이뤄낼 수 있지요.”
그는 앞으로 자개를 물감처럼 자연스럽게 화면에 스며들게 하는 실험을 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전시 문의 02-544-8481
허 엽 기자 he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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