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위기가 달라졌다. 피곤한 얼굴들이 금세 환해졌다. 귀고리를 한 20대 청년도, 수염을 멋지게 기른 40대 아저씨도 신이 났다. 야근하다 뛰어온 넥타이족들은 ‘나도 나도’를 외치며 합류했다. 음악에 맞춘 율동이 경쾌하다.
낯익은 얼굴이 보였다. 영화배우 차인표(39) 씨와 탤런트 박시은(26) 씨. 헐렁한 티셔츠에 청바지 차림의 차 씨는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란 구절이 나올 때마다 두 손을 높이 치켜들었다.
지난달 14일 오후 8시 서울 강남구 청담동 ‘컴패션 밴드’의 연습실. 일을 마치자마자 모여든 멤버들은 그렇게 또 다른 하루를 맞고 있었다.
컴패션 밴드는 연예인, 무대감독, 디자이너, 연극인, 회사원 등 21명으로 구성된 중창단. 나이도 직업도 다양하다. 그러나 목표는 하나. 저개발국가의 고통 받는 어린이들에게 하루빨리 ‘제2의 부모’를 찾아 주자는 것.
이들은 기독교계 국제구호단체인 ‘컴패션(www.compassion.or.kr)’ 후원자 모집을 위해 올 4월 자발적으로 뭉쳤다. 차 씨가 리더다.
중창단 멤버들은 대한민국에서 바쁘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울 사람들. 그러나 매주 두 번 연습실에 모여 밤늦게까지 춤과 노래 연습을 한다.
연말을 맞아 본격적인 후원자 모집 공연활동에 돌입했다. 지난달 12일 온누리교회, 19일 예능교회 공연에 이어 25일엔 자선파티 공연도 펼쳤다. 이달 3일엔 서울 은평구 서문교회 무대에도 섰다.
크리스마스 무렵에 줄줄이 계획된 자선파티에서도 ‘분위기 메이커’ 노릇을 톡톡히 하려 한다. 차 씨는 “노래할수록 내 마음의 상처가 치유되는 것 같다”며 “아직 준 것보다 받은 게 훨씬 많다”고 말했다.
○ 남자들, 뭉치다
“신애라(아내) 씨가 대신 가달라고 해서….”(차인표 씨)
“누나가 가라고 해서….”(이성수 씨·31·화가)
“와이프가 하도 권하기에….”(권효성 씨·41·인테리어 디자이너)
올 4월 여자들에게 ‘들들 볶인’ 남자 5명이 인도의 작은 마을에서 만났다. 컴패션에서 후원하는 어린이들을 만나러 간 것.
컴패션은 빈곤층 어린이와 1대1로 결연해 한 달에 3만5000원씩 10여 년 동안 돕는 방식의 구호단체다. 제2의 부모로서 5, 6세 아이들이 중고교생으로 자랄 때까지 지켜보게 된다. 그래서 ‘돕는다’ 대신 ‘아이를 키운다’고 말한다. 직접 아이들을 만나거나 편지를 주고받기도 한다.
“별생각 없이 갔던 인도. 아이들 200여 명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어요. 인사하려고 손을 잡는 순간 ‘작은 예수’를 만난 느낌이었죠. ‘뭔가 하자’고 결심했습니다.”(차 씨)
차 씨는 노래를 제안했다. 나중에 아이들에게도 들려줄 수 있기 때문이다. 오래전 손을 놓았던 기타를 새로 구입했다. 인도에서 마음이 통한 남자들은 여자들보다 더 적극적이다. 서울에 오자마자 남성 6인조 밴드를 결성했다. 인도에 간 다섯 남자에 ‘세라토’ ‘하이마트’ 등의 광고음악을 작곡한 정재윤(33) 씨가 가세했다. 평소 친분이 있던 차 씨의 “무조건 오라”는 말 한마디 때문.
정 씨는 추억의 만화영화 ‘개구리 왕눈이’를 부른 정여진 씨의 동생. 피는 못 속인다고 노래 실력이 상당하다.
데뷔 무대는 올 6월 현대백화점 압구정 본점에서 열린 ‘컴패션 사진전시회’. 이때부터 입소문이 나면서 지금은 21명의 중창단이 됐다. 탤런트 박시은, 뮤지컬 배우 김소연 씨 등 여자 멤버도 영입했다. 박 씨는 차 씨의 권유로 올 9월 가입해 보컬을 맡고 있다.
○“내 인생의 터닝 포인트”
“감상에 빠지는 건 질색이라고 굳게 마음먹고 우간다에 내렸지요. 샴임(9·결연한 우간다 어린이)이 ‘My Sponsor(내 후원자)’라고 외치며 달려오는 거예요. 천사인 줄 알았어요!”(박창훈 씨·41·정보기술업체 운영)
올 8월 우간다에서 박 씨는 인생의 ‘터닝 포인트’를 맞았다. 언제 죽을지 모른다며 부모가 출생신고조차 안 한 아이들이었다. 이제는 꿈이 생겼다며 웃는 아이의 모습이 그의 마음에 희망으로 박혔다. 그 후 삶의 우선순위가 바뀌었다. 사업으로 밤낮없이 바쁘게 살았지만 이제는 밴드 일이라면 어디서든 달려온다.
박 씨만이 아니다. 아이들을 만나고, 아이들에게 편지 쓰고, 그들을 위해 노래하면서 삶이 변했다고 입을 모은다. 얼굴이 너무 밝아져 ‘성형 의혹(?)’을 받은 사람도 있다.
다큐멘터리 프로듀서인 김대훈(33) 씨는 회사까지 그만뒀다. 요즘은 카메라를 들고 틈만 나면 인도나 우간다로 간다.
“아이들이 바뀌면 가정이 바뀌고, 지역사회가 바뀌어요. 그걸 눈으로 봤으니 가만히 있을 수 없죠. 변화를 카메라에 담아내고, 더 열심히 후원활동을 하고 싶었거든요.”(김 씨)
“‘나중에 돈 많이 벌면 한꺼번에 도와야지’ 했어요. 하지만 할 수 있을 때 조금이라도 하는 게 중요하단 걸 알았죠.”(이 씨)
“돕는 게 아니라니까요. 배로 받아요. 일을 덜해서 돈을 덜 벌어도 훨씬 큰 걸 받았는걸요. 부부 사이도 좋아졌어요.”(권 씨)
“우리 집요? 13명 키워요. 아내가 10명, 초등학교 2학년 아들이 3명. 아들은 외국인 친구가 생겼죠. 아이들에게 ‘사랑한다’고 편지 쓸 때마다 제 깊숙한 마음의 상처가 낫는 느낌입니다.”(차 씨)
차 씨는 은퇴하면 인도 우간다 남미 등 세계 곳곳에 있는 아이들을 만나러 다니기로 아내와 약속했다고 소개했다.
멤버들은 자신들처럼 인생의 터닝 포인트를 발견한 열정적인 사람들을 찾고 있다. 중창단 규모를 200명 정도로 키우고 싶단다.
“전문 가수들도 들어왔으면 해요. 팀을 나눠서 1년 52주, 전국 방방곡곡에서 공연하고 싶거든요. 그래야 아이들이 한 명이라도 빨리 ‘부모’를 만나 자신들이 사랑받는 귀한 존재라는 걸 깨닫죠.”(차 씨)
김현수 기자 kimh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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