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을 떠나보낸다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럽고 죄스러운 일인지 모를 겁니다. 아들을 위한 추모곡 ‘티어스 인 헤븐’을 발표할 생각은커녕 ‘3대 기타리스트 중 한 명’이라는 칭호도 귀에 들어오지 않을 정도였죠.”
내년 1월 23일 서울 올림픽공원 체조경기장에서 10년 만에 내한 공연을 하는 에릭 클랩튼(61·사진). ‘고해성사’로 시작된 e메일 인터뷰에서 그는 아들의 죽음, 슬럼프 등 인생의 고뇌를 겪으면서 왜 그가 블루스 음악에 집착할 수밖에 없었는지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40년 넘게 블루스 음악을 하는 것은 현세의 고통을 치유하기 위해서예요. 태어나서 처음 들은 음악이 블루스였고 방황하던 사춘기에도 의지할 것은 블루스뿐이었죠. 내 언어와도 같은 이 음악의 순수함을 믿어 왔고 언제까지나 그럴 것입니다.”
1960년대 ‘야드버즈’, ‘크림’, ‘블라인드 페이스’, ‘데렉 앤드 더 도미노스’ 등의 밴드 활동을 거치며 그는 블루스를 기반으로 포크, 재즈, 사이키델릭까지 다양한 음악 세계를 선보였다. 때로는 질풍노도처럼 징징대며, 때로는 기쁜 듯 가볍던 그의 기타 연주는 뮤지션의 ‘일기장’과도 같았다. 1970년대 솔로로 변신한 그는 ‘레일라’, ‘원더풀 투나이트’ 등으로 인기를 얻었고 1990년대 들어서는 음악적 다양화를 추구하며 ‘언플러그드’ 앨범으로 미국 내에서만 1000만 장의 음반 판매를 기록했다. 흑인 뮤지션 베이비페이스와의 합작 싱글 ‘체인지 더 월드’로 그래미상도 거머쥐었다. 그러나 2000년 이후 그는 점점 더 블루스에 집착하는 듯하다. 마치 ‘블루스학’을 연구하듯 난해한 연주도 서슴지 않는다. 이유는 단 하나, 스스로의 ‘만족’ 때문이다.
“이기적으로 들릴 수 있겠지만 내 음악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내 만족이에요. 난 단 한 번도 대중적으로 기타를 연주해 본 적이 없어요. 요즘 자신의 음악적 뿌리가 어딘지도 모르는 후배 뮤지션들이 있는데 그럴 거면 음악 말고 딴 일을 찾는 편이 낫다고 봅니다.”
그래도 그는 “가족이 있어 나름대로 행복하다”며 말을 이었다. 2002년 1월, 31년 연하인 한국계 여성 멜리아 매케너리(30)와 재혼해 세 딸과 함께 살고 있는 그는 “새롭게 꾸린 가정에서 더 열심히, 행복하게 사는 것이 하늘에 있는 코너의 죽음을 기리는 일”이라고 말했다.
40년 넘게 ‘기타 신’ 소리를 들어도 그는 “기타는 연습 도구가 아닌 인생의 동반자이자 가장 멋진 장난감”이라며 “10년 전 내한 공연 때 팬들에게 신청곡을 받았는데 이번 공연 때 연주해 볼 생각”이라고 말했다. 인터뷰가 진행될수록 점차 ‘거장’의 모습을 찾아가는 그에게 불편한 질문을 던졌다. “세상을 떠난 ‘비틀스’ 멤버 조지 해리슨에게 할 말은 없는가” 하고. 30년 전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든, 그가 ‘가로챈’ 해리슨의 전 아내 패티 보이드와의 삼각관계에 대한 대답이 궁금했다. 그러나 그는 이 질문만 공란으로 남겨 놓았다. 문의 1544-1555
김범석 기자 bsis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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