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 언어능력을 갖게 된 5만 년 전부터 최근까지 서양사의 수많은 대화의 역사를 추적한 이 책에서 대화란, 18세기 영국의 커피하우스와 프랑스의 살롱에서 절정에 이른 뒤 점차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가는 ‘무형문화유산’이다.
대화는 독창적 아이디어의 호혜적 교환과 정서의 고양이 있어야 한다는 점에서 잡담과 다르고, 특정한 목적을 지니지 않고 그 자체가 목적이라는 점에서 토크(talk)와 달라야 한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또 대화에 참여한 사람들이 평등해야 하고, 무엇보다 경청(傾聽)의 기술을 지녀야 한다. 정중함(에티켓)과 재치(위트)도 빼놓아선 안 된다.
반대의 사례들을 들여다보면 더 이해가 쉽다. 한국 TV쇼 프로그램의 인기코너였던 ‘당연하지’는 그 좋은 사례다. 상대가 무슨 말을 하든 ‘당연하지’로 답해야 하는 이 게임에서 이기는 방법은 상대의 치명적 약점을 파고들거나 말꼬리를 잡아 상대를 침묵시키는 것이다. 이 게임은 진짜 대화의 수많은 덕목을 희생시키는 대신 재치 하나만을 부각시킨다. 그러나 대화에 필요한 재치는 영혼의 흥겨움을 가져오는 ‘선의의 놀림’이지 결코 상대를 깔아뭉개는 것이 아니다. 저자가 오늘날 미국 대화문화의 실종을 상징하는 사례로 힙합문화를 드는데 ‘당연하지’는 그 문화의 산물인 ‘랩 배틀’을 한국화한 것이라는 점에서 이런 분석은 일맥상통한다.
저자가 대화를 ‘멸종위기에 처한 문화’로 만든 주범으로 지목하는 것은 1960년대 이후 미국사회를 사로잡은 ‘반체제문화’. 이 ‘분노의 문화’는 개인의 솔직함과 진정성을 담보한다는 이유로 분노의 표출과 욕설과 외설을 통한 자기표현을 적극 장려한다.
이것이 ‘개인적 오르가슴’을 안겨줬는지는 몰라도 전체 사회에는 심각한 중독증세를 낳았다. ‘상스러운 말투의 왕’ 에미넴이 21세기 미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대중문화 아이콘이 되고, 미국 보수주의 아성의 수문장으로 알려진 딕 체니 부통령이 의회에서 상원의원을 향해 상스러운 말을 퍼부은 사례는 이를 여실히 보여 준다. 이들의 공통점은 둘 다 대화의 달인이 아니라 독설의 달인이라는 점이다.
이런 상황은 한국사회에도 고스란히 반영된다. 대중문화가 욕설에 점령된 지는 이미 오래다. 요즘은 공중파 방송조차 ‘진정성’이라는 이름으로 상스러운 표현의 전파에 앞장서고 있다. 공공장소마다 청소년들이 뱉어내는 욕설의 데시벨은 점점 커지고, 대통령마저 거친 표현을 자신의 진정성을 전달하는 효과적 수단이라고 믿고 있지 않은가.
고고해 보이는 학자들 역시 대화의 문화를 고사시키는 주역 중 하나다. 몽테뉴는 “책으로 하는 공부에는 나른하고 연약한 몸짓만이 따르는 한편 대화는 가르침과 연습을 한꺼번에 제공한다”며 학문보다 대화를 더 찬미했다. 그러나 창백한 책과 독단적 설교의 늪에 빠진 현대의 학자들은 상대의 말을 경청할 줄 모른 채 자기 의견을 발표할 순서만 기다리는 속물들로 전락했다고 저자는 비판한다.
여기에 ‘대화 회피 장치’라고 부르는 아이팟, 휴대전화, 플레이스테이션의 범람으로 ‘대화의 장’ 자체가 닫히면서 이 고상한 쾌락의 종말을 재촉하고 있다는 저자의 우울한 진단이 이어진다. 내년에 또 한 차례 펼쳐질 열변과 독설의 계절은 얼마만큼이나 대화라는 아름다운 문화의 조락을 촉진할 것인가. 원제 ‘Conversation: A History of a Declining Art’(2006년).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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