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천재는 동시대 사람들이 몰라줄 때가 많다.
1892년 12월 18일 차이콥스키의 ‘호두까기 인형’이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초연됐지만 그는 또 한번 관객과 평단의 외면을 받았다.
‘백조의 호수’ ‘잠자는 숲 속의 미녀’를 내놓았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이듬해인 1893년 발표한 교향곡 ‘비창’에도 온갖 악평이 쏟아졌으니 그가 적잖이 실망할 법도 하다.
이 작품은 독일 작가 호프만의 ‘호두까기 인형과 생쥐의 왕’이라는 동화가 원작이다. 예로부터 독일인들은 호두까기 인형이 악령으로부터 가족을 지켜 준다고 여겼다.
하지만 원작은 독특한 상징성 때문에 다소 음울한 분위기였고 오히려 1844년 프랑스의 문호(文豪) 알렉상드르 뒤마가 각색한 작품이 더 ‘동화적’이었다고 한다.
밝고 명랑한 음악을 만들고 싶었던 차이콥스키는 결국 뒤마의 작품을 원전으로 택했다. 당시 우울한 색채가 지배적이었던 그의 작품들을 감안할 때 이례적인 결정이었다.
실제로 그는 음악에 환상적인 분위기를 입히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다.
‘사탕 요정의 춤’ 곡에서는 첼레스타라는 건반 악기 소리를 들을 수 있는데, 차이콥스키가 이 악기를 구하기 위해 프랑스까지 몸소 달려갔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하지만 당시 평론가들은 그의 음악을 두고 “춤을 추기에 너무 복잡하다”고 비난했다. 심혈을 기울여 만든다는 것이 너무 혁명적인 음악이 돼 버린 것일까.
호두까기 인형의 진가(眞價)는 그가 죽은 뒤에야 나타났다.
1944년 대서양을 건너간 이 작품은 가족적인 분위기로 어필하며 미국인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다. 지금도 매년 겨울이면 호두까기 인형을 공연하는 단체가 미국에서만 500개가 넘을 정도다.
세계 유수의 안무가들에 의해 재해석돼 버전도 다양하다.
주인공 이름이 ‘클라라’가 아니라 ‘마리’이거나, 첫 장면이 성탄파티가 아니라 생일파티일 때도 있고 아예 주인공이 여자가 아닌 남자 아이인 경우도 있다.
얼마 전 한국에서 선보인 영국 안무가 매슈 본의 버전도 원작의 파티 장면 대신 음침한 보육원에서 작품을 시작했다.
올해 한국에서도 다양한 종류의 호두까기 인형이 관객들을 기다린다. 연말연시에 온 가족이 즐길 수 있는 격조 높은 문화 나들이로 손색없다.
유재동 기자 jarret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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