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아하고 낭만적인 상상을 한다면 말이다. 그러니 캐비닛에서 근사한 러브스토리가 나올 거라고 생각하진 말자. 혹은 멋들어진 세태 풍자가, 선 굵은 역사물이 나올 거라고도.
김언수(34) 씨의 장편 ‘캐비닛’(문학동네)에는 전혀 다른 게 들어 있다. 이건 심토머(symptomer)들의 얘기다. ‘심토머’들이란 변종 형태, 말하자면 ‘엑스맨’ 같은 사람들, 공기업 직원이 회사에서 찾아낸 13호 캐비닛 안에 든 375명 중 일부다.
“자크 아탈리의 ‘21세기 사전’을 읽다가 갑자기 생각났어요. 토포러(toporer) 얘기를 써보자. 쓰다 보니 타임스키퍼도 나오고, 네오헤르마프로디토스도 나오는 거예요.”
토포러는 172일을 잠만 자는 사람, 타임스키퍼는 인생에서 몇 시간씩, 며칠씩 시간을 잃어버리는 사람, 네오헤르마프로디토스는 남녀 성기가 한 몸에 있어 자가수정도 가능한 사람이다. 책에는 이렇게 상상 불가의 변종들 얘기가 쏟아져 나온다. ‘아라비안나이트’ 같은 에피소드 모음에다 SF소설 같기도 한, 수상쩍은 이 작품은 놀랍도록 잘 읽힌다. 몇 장(章) 지나지 않아 다음엔 어떤 엑스맨이 나올지 궁금해질 정도다.
별스러운 상상력으로 충만한 작가 김언수 씨가 털어놓는 삶의 이력은 놀랍게도 설비 막일꾼, 단란주점 웨이터, 무전기공장 노동자 등 몸으로 부대낀 체험으로 가득하다. 17세 때부터 시인을 꿈꿨고 고교 문예반 시절 죽을 듯이 시만 썼지만 “10년 만에야 시인은 못 되겠다는 걸 깨달았다.” 제대하고 설비 일을 하다가, “김 군아, 내가 설비만 30년 했는데 30년 전이나 지금이나 사는 게 똑같다, 너는 젊으니까 딴 거 알아봐라”라는 말을 듣고 대학수학능력시험 공부를 시작한다. 국문과에 들어갔고, 시인 대신 소설가가 되기로 결심했으며, 2003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중편)에 당선돼 소설가로 등단했다.
‘캐비닛’은 김 씨가 지난해 경북 봉화의 고시원에 ‘처박혀’ 쓴 것이다. 제12회 문학동네소설상에 응모해 당선작으로 뽑힌 이 소설은 “한국문학은 또 한 명의 괴물 같은 작가를 갖게 됐다”(평론가 류보선)는 찬사가 나올 만큼 높은 평가를 받았다.
“그냥 평범한 캐비닛”이라며 시치미를 떼는 작가. 그렇지만 에피소드 말미마다 실린, 현대인의 병폐를 꼬집는 절묘한 단상은 이 ‘캐비닛’이 그저 기발하고 재미나기만 한 이야기상자가 아니라는 걸 일깨운다. “소설가는 이야기를 담는 기술자라고 생각해요. 적대적이고 모순적이며, 이질적이고 이해할 수 없는 존재들을 살아 있는 방식 그대로 훼손하지 않고 캐비닛에 담아두는….” 그러니까 이 소설은 ‘소설 쓰기란 무엇인가’에 대한 거대한 비유다.
다음엔 어떤 캐비닛을 열어 보일지? 작가는 또 시치미를 떼다가 지나가듯 말했다. “또 처박힐 거고, 나사 조이는 일거리 생기면 할 거고, 10년 구상한 장편 있으니까 쓸 거고….”
김지영 기자 kimj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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