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사회]자유를 말소하라… ‘전체주의의 기원’

  • 입력 2006년 12월 23일 02시 59분


한나 아렌트는 나치즘과 스탈린주의를 전체주의로 묶을 수 있는 고리로 소외된 대중(폭민)에 대한 의존, 이념의 사이비 과학화, 운동의 영구화, 총체적 테러의 지배를 꼽았다. 그림은 러시아 화가 쿠스토디예프의 ‘러시아 혁명’. 사진 제공 한길사
한나 아렌트는 나치즘과 스탈린주의를 전체주의로 묶을 수 있는 고리로 소외된 대중(폭민)에 대한 의존, 이념의 사이비 과학화, 운동의 영구화, 총체적 테러의 지배를 꼽았다. 그림은 러시아 화가 쿠스토디예프의 ‘러시아 혁명’. 사진 제공 한길사
◇전체주의의 기원 1, 2/한나 아렌트 지음·이진우 박미애 옮김 888쪽·1권 2만5000원, 2권 2만2000원·한길사

독일의 나치즘·파시즘과 소련의 스탈린주의를 전체주의로 묶어 바라보는 것은 1930년대부터 있었다. 이를 정치이론화한 것은 C J 프리드리히와 즈비그뉴 브레진스키의 공저 ‘전체주의적 독재와 전제정치’(1956년)로 꼽힌다. 한국에서 반공주의의 이론서로 자주 원용된 이 책은 1980년대 이후 우파와 좌파를 무리하게 하나의 범주로 묶고 있다는 비판을 받아 왔다.

그러나 이 정치이론서에 큰 영향을 준 정치철학서로서 ‘전체주의의 기원’은 그러한 현상적 비판을 무력화시키는 투명하고도 명쾌한 통찰을 보여 준다. 올해 탄생 100주년을 맞은 유대인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의 필생의 화두는 나치의 유대인 학살이었다.

미국에서 망명생활 도중 유대인학살의 소문을 들은 그는 처음에 이를 믿지 않았다. 나치 치하에 있었던 그조차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엄연한 ‘현실’이었다. 그 소름끼치는 현실에 직면했을 때 아렌트가 취한 반응은 ‘나는 이해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그 이해의 방법으로 1945년부터 집필에 들어가 1951년에 완성된 이 책이 그 거시론이라면 1963년 발표한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은 그 미시론인 셈이다.

아렌트는 기존의 전제정치, 참주정, 독재정치와 전체주의의 본질적 차이를 대중 이념 운동의 삼각지대에서 포착한다. 전체주의는 계급사회가 붕괴하면서 등장한 고독한 대중, 스스로를 쓸모없는 ‘잉여적 존재’로 느끼고 절망적이고 증오로 가득 찬 대중의 지지에 의존한다. 그 지지는 과학의 수준으로 격상시킨 이념과 그 이념을 수원지로 삼아 끊임없이 흘러나오는 운동을 통해 획득된다.

나치의 이념이 다윈의 진화론에 근거한 자연법칙을 좇는다면 스탈린주의는 마르크스주의에 기초한 역사법칙을 좇는다. 자연이든 역사든 그것은 절대적인 과학법칙이며 인간 개개인을 관통해서 흘러가는 운동이다. 전체주의에선 개개인의 행동이 옳고 그름이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은 이 때문이다. 나치즘에서 유대인은 인류에 대한 죄악 때문이 아니라 자연법칙에 도태됐기 때문에 학살됐고, 스탈린주의에서 부르주아계급은 착취와 억압의 주체이기 때문이 아니라 역사에서 쇠퇴해 가는 계급이기 때문에 처형됐다. 전체주의에서 운동은 이 법칙을 더욱 가속화하는 것이고, 그 효과적 수단으로 ‘총체적 테러’가 도출된다.

“전체주의 정부에서 테러는 반대파의 진압을 위해 이용되기는 해도 단순히 반대파의 진압을 위한 수단은 아니다. 테러가 모든 반대와 무관하게 될 때 전체주의적이 된다. 아무도 방해받지 않을 때, 테러는 가장 위에 군림하며 통치하게 된다. 합법성이 비독재 정부의 본질이고 무법이 독재의 본질이라면, 테러는 전체주의 지배의 본질이다.”

전체주의가 독재자의 자기이익이나 권력욕 때문에 저지른 기만의 결과가 아니라 자체 메커니즘의 산물이라는 이런 통찰은 훗날 나치전범 아이히만에게서 발견한 ‘악의 평범성’으로 연결된다.

다른 독재정치가 자유를 억압하거나 파괴한다면 전체주의는 이런 메커니즘으로 인해 아예 자유의 말소를 추구한다. 전체주의가 자유의 가장 큰 적이라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아렌트에게 자유는 인간과 인간 사이의 빈 공간을 의미하며 그것을 어떻게 채우는가가 ‘정치의 내용’을 이룬다. 따라서 전체주의는 가장 극단적 형태의 정치부정이다.

저 뜨거웠던 한국의 1980년대를 달궜던 동력이 곧 이념과 운동이었음을 기억하는가. 갈수록 커져 가는 대중의 힘을 어떻게 통제할 것인가를 고민한 적이 있는가. 정치에 대한 대중의 무관심 내지 환멸이 가져올 부정적 결과를 우려한 적이 있는가. 한국에 뒤늦게 도착한 이 책이 ‘오래된 현재’로 읽히는 이유다. 원제 ‘The Origins of Totalitarianism’(1951년).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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