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예술]딱 90일만 더 살아볼까

  • 입력 2006년 12월 3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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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제공 문학사상사
사진 제공 문학사상사
◇딱 90일만 더 살아볼까/닉 혼비 지음·이나경 옮김/400쪽·9500원·문학사상사

“그래서 제야에 자살하는 사람이 그렇게 많은 거겠죠.” “그 다음은 언제지?” “다음 12월 31일이겠지.”(본문 130쪽)

올 초에 무슨 목표를 세웠더라? 기억도 안 나니 이룬 게 없는 거지 뭐. 크리스마스도 혼자였는데 섣달그믐도 혼자라면 죽고 싶은 마음이 들 거다.

이번 주 한 번쯤은 했을 법한 얘기. 그리고 어떤 사람들에겐 넋두리로 그치지 않는다. 한 해의 마지막 날이라는 생각만 해도 싱숭생숭해지는데, 잔뜩 꼬여 있는 인생이 새해에도 ‘변화 불가’인 것 같다면 정말, 그날이 세상의 마지막 날이면 좋겠다는 마음마저 들 터.

마틴도 그랬다. 하룻밤 잔 그 여자, 맹세코 열여덟 살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열다섯 살이란다. TV토크쇼 진행자가 이런 일을 저질렀으니 다음 수순은 매장이다. 그래서 12월 31일 밤, 빌딩 옥상에 섰다. 그런데 웬걸, 마틴뿐 아니다. 50대 아줌마에 열여덟 살 소녀에 미국인 피자배달부까지, 이건 완전 자살반상회다.

영국 소설가 닉 혼비(50)의 새 장편 ‘딱 90일만 더 살아볼까’는 우연히 한데 모인 자살 희망자 네 명의 얘기다. 혼비는 영화 ‘나를 미치게 하는 남자’(원작 ‘피버 피치’), ‘어바웃 어 보이’, ‘사랑도 리콜이 되나요?’(원작 ‘하이 피델리티’)의 원작 소설을 쓴 작가다. 새 소설 ‘딱 90일만…’도 배우 조니 뎁이 영화 제작을 맡아 내년에 개봉할 예정이다.

유머 넘치는 글을 쓰는 작가답게 ‘자살 얘기가 이렇게 재미있어도 되나’ 싶을 정도다. 솔직히 네 사람의 한탄을 듣다 보면 죽고 싶은 마음이 절로 이해가 된다. 그런데 그 한탄을 시니컬하게 풀어내는 작가의 솜씨에, 사정은 딱하지만 웃음을 참을 수 없다. 중증 장애인 아들을 혼자서 20년 키우느라 몸도 마음도 녹아웃인 모린. 젊은 날 방탕하게 산 대가라면 모를까, 딱 한 번 잤는데 아이가 생겼고 지금의 아들을 얻었다. 제스는 행방불명된 언니 때문에 그늘이 걷히질 않는 데다 얼마 전 남자친구한테도 차였다. 원대한 뮤지션의 꿈을 품고 영국으로 온 제이제이는 현재 피자배달부로 하루하루 살고 있다.

이렇게 모였으니 서로 얘기나 들어보자 하던 것이, “그게 무슨 죽고 싶은 이유냐”고 서로 싸우게 되고, 지금 죽지 말고 딱 90일만 더 살아 보자고 합의하는 데 이른다. 책은 그 90일의 유예 기간에 변화하는 네 사람의 마음의 행로를 따라간다. 삶의 방향을 갑작스레 바꾸는 일은 일어나지 않지만, 상처 입은 사람들이 서로를 위로하면서 조금씩 생의 의지를 얻기까지의 과정이 작가 특유의 위트 넘치는 문장으로 펼쳐진다. 앞이 보이지 않는 인생을 감당할 수 없어 죽음을 결심했던 사람들은, 앞날을 알 수 없기 때문에 매력적인 것이 인생임을, 툴툴대면서도 받아들이게 된다. ‘불행 끝, 행복 시작’이라고 단칼에 선언할 순 없지만 그게 또 인생의 맛 아니던가.

90일 뒤에는? 그들은 별로 변하지 않았다. 여전히 실업자인 마틴은 이웃집 아이의 독서 지도를 하느라 고군분투하고 있고, 모린은 여전히 아들을 돌보면서 시간을 보낸다. 제스는 그새 새 남자 친구를 사귀었지만 썩 좋은 인간 같진 않다. 제이제이는 길에서 노래를 부르고 있는데 경쟁자가 더 인기다. 그래도 넷은 더는 자살을 희망하지 않는다. 나아진 것 같진 않지만 실제로는 너무 많이 달라진 90일. 섣달그믐 우울한 사람들도 ‘딱 90일만…’을 읽다 보면, “까짓것, 또 한 해 살아보지, 뭐”라고 말하게 될 것이다.

원제 ‘A Long Way Down’(2005년).

김지영 기자 kimj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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