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예술]야쿠자와 요코즈나

  • 입력 2006년 12월 30일 03시 00분


1971년 요절하기 직전 요코즈나였던 다마노우미가 자신의 방에서 일본도를 들고 포즈를 취했다. 표정에 어딘지 그늘이 져 보인다. 동아일보 자료 사진
1971년 요절하기 직전 요코즈나였던 다마노우미가 자신의 방에서 일본도를 들고 포즈를 취했다. 표정에 어딘지 그늘이 져 보인다. 동아일보 자료 사진
◇야쿠자와 요코즈나/조헌주 지음/412쪽·1만4000원·나남

“아버지가 조선인이란 사실이 알려지면 어떻게 할 거야. 형이 책임질 거야? 조선인이란 게 알려지면 난 더 이상 스모를 할 수 없어. 사귀는 여자들도 다 도망가 버릴 거야. 절대 입 밖에 내지 마.”

일본 스모를 제패했던 ‘다마노우미(한국명 정정부·鄭正夫)’. 1970년 한국 씨름의 ‘천하장사’에 해당하는 최고 등급인 요코즈나 등극. 1971년 사망. 그러나 그를 아는 한국인은 거의 없다. 한국계였던 역도산이 레슬링에서, 장훈이 야구에서 ‘전설’을 이뤄냈지만 다마노우미는 50대 이상의 소수 일본 스모팬들만 어렴풋이 기억할 뿐이다.

‘재일 한국인 2세 형제의 운명적 삶’이란 부제가 붙은 이 책은 동아일보 도쿄특파원을 지냈던 저자가 발굴한 드라마 같은 실화다. 조선인 아버지(정유성)와 일본인 어머니 사이에 태어나 형은 야쿠자의 길로, 동생은 당대 최고의 스모선수로 운명이 갈렸다. 형제의 삶은 엇갈렸지만 그들의 공통점은 마음속에 ‘조센진’에 대한 수치심과 증오심만이 가득했다는 것이다.

도박을 업으로 삼는, 말보다는 주먹이 앞서는, 심심하면 새엄마를 갈아들이는 조센진 아버지. 아버지의 폭력 때문에 4형제를 버리고 달아난 어머니. 아버지에 대한 증오와 반감으로 어린 시절을 보낸 형 다니구치 슈이치(한국명 정수일·鄭秀一)는 고교를 중퇴한 뒤 ‘조직세계’에 발을 들였다가 선배를 팬 건설노무자 집단의 오야붕을 칼로 찔러 살해한다. 그 뒤 걸었던 길은 누구나 상상할 수 있는 건달의 그것이었다.

중학교 때부터 유도에 뛰어난 재능을 보인 동생 다니구치 마사오. 중학교 졸업 후 스모계에 뛰어들어 11년 만인 26세 때 51대 요코즈나에 등극함으로써 일본 스모 역사상 첫 외국계 요코즈나가 된다.

하지만 그는 스모에 입문할 때 어머니의 성 ‘다니구치’로 호적을 세탁하고 이름도 바꾼다. “아버지는 어렸을 때 돌아가시고…. 홀어머니 밑에서 어렵게…” 그가 대외적으로 밝힌, 그리고 일본인들이 아는 그의 혈통에는 아버지의 존재가 철저하게 부인된다. 오죽했으면 그가 27세 때 폐동맥간 혈전증으로 요절한 직후 그의 추모 공연에서 한 창가 가수가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라고 읊었다가 분노한 아버지에게 흠뻑 얻어맞은 일도 있었다.

이 책은 저자가 형 다니구치 슈이치에게 생생히 전해 들은 한국계 일본인 형제의 파란만장한 삶을 기록한 논픽션. 하지만 저자의 작가적 상상력과 스토리 구성 능력 덕에 잘 짜인 소설 한편을 읽는 듯한 느낌을 준다.

주인공 형제는 ‘영웅’이 아니다. 저자는 철저하게 관찰자로서 두 사람의 삶을 조명한다. 그럼에도 책을 읽고 나면 울림이 남는다. 조선인 아버지를 지우고 스스로 ‘사생아’가 됐던, 조선인이라는 사실이 드러날까 평생 전전긍긍했던 형제의 애절한 운명이 가슴을 시리게 한다.

윤영찬 기자 yyc11@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