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惡濕居下(오습거하)’라는 말이 있다. ‘惡’는 ‘나쁘다, 흉악하다’라는 뜻으로 쓰일 때는 ‘악’으로 읽지만, ‘싫어하다, 미워하다’라는 뜻으로 쓰일 때는 ‘오’라고 읽는다. ‘惡心’은 ‘나쁜 마음’이라는 뜻이므로 ‘악심’이라고 읽으며, ‘憎惡’는 ‘미워하고 싫어하다’라는 뜻이므로 ‘증오’라고 읽는다. ‘濕’은 ‘축축하다, 습기가 차다, 습기’라는 뜻이다. ‘濕度(습도)’는 ‘습기가 찬 정도’라는 뜻이고, ‘濕地(습지)’는 ‘축축하게 젖은 땅’이라는 뜻이다. ‘居’는 ‘살다, 거주하다’라는 뜻이다. ‘同居(동거)’는 ‘함께 살다’라는 말이고, ‘居處(거처)’는 ‘사는 곳’이라는 말이다. ‘下’는 ‘아래, 낮은 곳’이라는 뜻이다.
이상을 정리하면 ‘惡濕居下’는 ‘습기를 싫어하면서 낮은 곳에 살다’라는 말이 된다. 낮은 곳에는 습기가 차기 마련이다. 습기를 싫어하면서도 낮은 곳에 살면 결국 습기를 면하지 못하게 된다. 그러므로 내가 원하는 것이 있으면 그곳으로 옮겨갈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진정한 용기이다.
공부를 잘하기를 원한다면 책상 앞에 앉아 있어야 하고, 돈을 모으기를 원한다면 돈을 쓰는 곳에 있으면 안 된다. 칭찬을 듣고 싶으면 칭찬 받을 만한 일을 하면 되고, 예쁜 것이 좋으면 예쁜 행동을 하면 된다. 그러나 우리는 가끔, 아니 자주자주 놀면서 공부 잘하기를 원하고, 미운 짓을 하며 칭찬 받기를 원한다. 이것이 ‘惡濕居下’이다. 자신의 행복을 원하고 영광을 원하고 명예를 원한다면, 지금 내가 있는 곳이나 지금 내가 하고 있는 행위가 ‘惡濕居下’는 아닌지 살펴볼 일이다.
허성도 서울대 교수·중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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