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처럼 멋진 공연 한 편이 주는 감동에 흠뻑 빠졌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아쉽다.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 공연의 명장면을 떠올리며 식사도 하고 수다도 떨고 싶다.
여유로운 삶과 문화를 갈망하며 공연장을 찾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가슴 한쪽에 벅차오르는 감동을 갖고 밖으로 나오지만 공연장의 여운을 이어갈 만한 곳을 찾기란 쉽지 않다. 너무 뻔한 레스토랑이나 카페는 아무리 장소가 아쉬워도 탐탁지 않다. 공연장 주변엔 오랜 전통과 깊은 맛, 훈훈한 인정이 절묘하게 녹아든 공간들이 숨어 있다.
운이 좋으면 방금 전 공연장에서 만난 배우와 연주자를 바로 눈앞에서 볼 수 있는 ‘공연장 밖 특석’의 행운도 차지할 수 있다. 서울 시내의 대표적인 공연장을 중심으로 가볼 만한 명소와 사연을 소개한다.》
서울 종로구 동숭동 일대의 대학로는 한국 공연문화의 산실이다.
하지만 이 명칭의 역사는 그리 길지 않다. 1985년 종로구 혜화동 로터리에서 이화동 사거리까지를 ‘문화의 거리’로 조성하면서 대학로라는 이름이 생겼다. 1970년대까지는 서울대 문리대 등이 있어서 ‘문리대길’로 불렸다.
대학로는 공연장으로 유명한 다른 지역에 비해 상업화가 심한 곳이다. 하루가 다르게 거리 풍경이 바뀐다.
그래도 1956년 옛 서울대 캠퍼스 옆에 문을 연 학림다방은 꿋꿋하게 이곳을 지키고 있다.
‘광란의 젊은 시절을 이곳에서 보낸다는 사실이/정말 사실일까/…/학림다방은 남았다’
시인 김정환의 ‘학림다방’이다.
달갑지 않지만, 어쩔 수 없이 이곳의 변화를 지켜보는 것이 학림다방의 슬픈 운명일지도 모른다.
○ 학림다방에는 꼭 들르자=이곳을 찾는 것만으로 당신은 우리 현대사의 과거와 현재를 동시에 만날 수 있다. 20년째 운영 중인 이충렬 씨는 “학림이 이제껏 존재할 수 있었던 것은 돈을 많이 벌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며 “명승고적은 아니더라도 생활에서 추억을 불러일으킬 공간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삐걱대는 나무계단, 클래식 레코드 음악, 낡은 탁자와 기둥 등 바뀐 것이 거의 없다. 또 하나, 변치 않는 이 다방의 커피향도 함께 느껴보자. 02-742-2877(이하 서울 지역번호 02 생략)
○ 즉흥 공연이 보고 싶다=2003년 문을 연 ‘서커스싸구려관람석’(765-3799)은 프란츠 카프카의 소설에서 이름을 땄다. 주인 장용철 김지선 씨는 극단 ‘작은 신화’에 소속된 연극인 부부다. 작은 밴드와 LP판을 살린 인테리어에 연극 포스터로 1980년대 분위기가 물씬 풍긴다. 음악을 좋아하는 주인이 직접 색소폰을 불거나 연극인들이 같이 노래를 부른다. 가끔 나무상자를 쌓아놓고 벌이는 즉흥 공연도 볼 수 있다. 냉장고 맨 밑에 ‘키핑용’ 소주를 보관한다. 남은 소주가 아깝기도 하고, 주머니가 얇은 후배들을 배려하기 위해 만든 공간이다.
○ 옛맛이 그립다=‘명광식당’(763-6509)은 2대째 운영되는 식당. 3000∼4500원대의 청국장, 제육볶음, 오징어볶음 등과 백반이 주메뉴다. 허름하고 좁은 공간을 연극 포스터로 가득 채워놓았다. ‘마미 하우스’(765-0842)는 청국장과 느끼하지 않은 해장국, 감자탕으로 유명하다.
○ 재즈가 듣고 싶다=‘천년이 되도록 이 카페가 재즈와 함께 남으리라‘는 음악에 대한 집념과 열정이 담긴 ‘천년동안도’(743-5555). 바로 옆 공사 현장의 소음이 귀에 거슬리지만 1년 365일 라이브 재즈 연주를 들을 수 있다.
○ 연극인을 만나고 싶다=‘원탁의 기사’(745-0469)는 연극인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들렀을 법한 주점이다. 연극 애호가인 주인이 배우를 위해 촬영한 공연 비디오가 보관돼 있다.
‘장’(742-4788)은 극단 ‘미추’ 단원과 연출가 오태석이 자주 찾는 곳. 연극과 관련된 정보를 쉽게 얻을 수 있다. 매콤한 카레 요리와 홍합을 이용한 음식이 일품이다.
옛날 레스토랑 분위기로 음료와 술 등을 판매하는 ‘호질’(764-6822)은 23년의 짧지 않은 역사를 지녔다. 처음에는 고려대 앞에서 시작했지만 숙명여대를 거쳐 1998년 대학로에 정착했다. 연극배우 권성덕, 연출가 권오일 등 원로 인사들이 자주 들른다.
○ 뮤지컬 배우를 만나고 싶다=‘행운 숯불갈비’(741-2193)는 설경구 조승우 등이 출연한 ‘지하철 1호선’ 팀이 자주 찾는 곳으로 갈비와 설렁탕이 유명하다.
‘나성아네’(3676-4630)는 ‘시카고’ ‘렌트’ 등에 출연한 뮤지컬 배우 나성아가 운영하는 주점으로 특이하게 자신의 이름을 붙였다. 서울예전 선후배와 뮤지컬 배우들이 단골이다. 김치찜, 날치알 쌈을 비롯한 술안주가 주메뉴이며 손님이 적을 때는 즉흥 공연이 펼쳐진다.
○ 이국적인 분위기를 느끼고 싶다=운치 있는 곳을 원한다면 ‘호프만의 이야기’(763-7796)가 좋다. 탁 트인 전망과 운치 있는 테라스가 특징. 비나 눈이라도 오면 환상적인 분위기가 연출된다. ‘산타나’(763-9933)는 정통 흑맥주를 판매하는 곳으로 넓은 공간 때문에 회식 장소로 적당하다.
○ 공연장 말고 박물관도 있다=대학로에는 공연장만 있는 것이 아니다. ‘쇳대 박물관’(766-6494) ‘로봇 박물관’(741-8861) ‘짚풀 생활사 박물관’(743-8787)이 있다. 쇳대 박물관은 국내외 자물쇠를 주제로 한 공간이다. 로봇 박물관은 초기 원형의 로봇부터 미래형 지능 로봇까지 테마별로 전시하고 ‘짚풀…’은 짚풀을 이용한 각종 공예품과 생활사적으로 의미가 있는 작품을 선보이고 있다.
○ 미술관도 들러보자=‘아르코 미술관’(760-4602)은 복합미술지원센터로 관객들의 시각 문화에 대한 이해를 높이기 위한 기획 전시를 많이 한다. ‘갤러리 정미소’(743-5378)와 ‘목금토(木金土) 갤러리’(764-0700)에선 대학로 분위기에 맞는 젊고 실험적인 작품들이 주로 전시된다.
○ 싸고 특이한 메뉴가 있다=‘삼삼뚝배기’(765-4683)는 비벼 먹는 뚝배기 집으로 3000원대 된장과 순두부 뚝배기 등 5가지 메뉴로 유명하다. ‘컬투’ ‘웃찾사’ 등 개그맨 팀이 자주 들른다. ‘왕소금구이’(763-1700)는 갈빗살과 대나무통에 담아 나오는 죽통주가 인기다. 연극인들이 좋아하는 별미는 양푼그릇에 나오는 김치찌개(1만 원). 최대 5명이 먹을 수 있다.
○ 간단한 분식이 먹고 싶다=‘둘리분식’(744-8626)은 떡볶이 1500원, 순두부찌개 2500원, 비빔밥 2000원 등으로 값이 매우 싸다. 1989년 문을 열었는데 연극인 박해일 정흥채 등이 배고픈 무명시절에 즐겨 찾았다고 한다.
글=정세진 기자 mint4a@donga.com
김갑식 기자 dunanworld@donga.com
디자인=김성훈 기자 ksh97@donga.com
구독
구독
구독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