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일 서울 서대문구 창천동 신촌현대백화점 근처 놀이터. 어디선가 나타난 100여 명의 사람들이 베개싸움을 벌이기 시작했다. 시끌벅적하게 베개싸움을 하는가 싶더니 6분도 되지 않아 동시에 그 자리에 드러눕는다. 순식간이다.
웬 젊은이 하나가 “여기서 자면 얼어 죽어요”라고 속삭인다. 꿈쩍도 하지 않는 그들. 또 2분이 지났다. “일어나, 아침이에요!” 순식간에 100여 명이 일어나 온데간데없다.
구경꾼들의 표정은 허탈감 그 자체. 조흥선(25·회사원) 씨는 “이런 광경은 처음 본다”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누군가가 “디카폐인(디지털카메라에 미친 이들을 이르는 말)들”이라며 비아냥거린다.
이 ‘수상한’ 놀이에 함께한 20대 남자에게 참가 이유를 물었다. 대답이 황당하다. “사는 게 힘들죠? 경제가 어려워서 그래요.” 두 여고생은 까르르 웃는다. “그냥 재밌잖아요.”
플래시몹(인터넷이나 e메일 등을 이용해 정해진 시간과 장소에 모여 약속된 행동을 짧은 시간에 하고 곧바로 흩어지는 것)이다. 인터넷카페 ‘플래시몹(cafe.daum.net/flashmob)’에서 이 ‘무의미한 놀이’를 시작한 지 3년 만에 50회를 맞았다. 국내 어디서도 이렇게 오래 플래시몹을 지속한 적이 없다.
그 사이 플래시몹은 캠페인과 광고, 공연 등 여러 대중문화의 모티브로 사용됐다. 이 무의미한 놀이가 50회까지 이어지며 각종 문화의 모티브로 활용된 힘은 뭘까. 우연인 듯 “그냥 하는 거야”를 외치는 이 놀이를 준비한 사람들은 누굴까.
○ 오후 4시(플래시몹 시작 3시간 반 전)… 엄격한 원칙과 체계가 숨어 있다
이날 신촌현대백화점 근처 한 커피숍. 음치대마왕(21) 등 모버레이터(moberator·플래시몹 진행요원)들이 차례로 들어섰다. 플래시몹 카페 주인장인 이츠쇼타임(22)이 들어서자 시끌벅적 회의가 시작된다. 서로 꽤 절친해 보인다. 그러나 단박에 친구는 아니란다.
“플래시몹을 제대로 즐기기 위한 관계일 뿐이에요.” 이들은 몹을 준비할 때만 만난다. 서로 진짜 이름도 주소도 모른다. “서로 누군지 아는 것도 창피하잖아요?” 엄마친구딸(18·여)이 깔깔대며 웃는다. 21세기 인터넷세대. 그들 인간관계의 단면을 보는 듯하다. 이들의 철저한 익명성은 플래시몹의 주요 원칙 중 하나이기도 하다. 나머지 원칙은 △정확한 의미를 알고 참여한다 △정치적 상업적 공익적 목적 등을 위해 하지 않는다 등 무려 7가지. 이 중 하나라도 어기면 플래시몹이 아니다.
모버레이터들은 메신저로 수차례 플래시몹 초안을 구상한다. 밤새워 지시서를 만든다. 플래시몹이 끝난 뒤에는 부족한 점을 체크해 다음 몹에 반영한다. 우연처럼 보이는 놀이는 이처럼 엄격한 원칙과 조직적인 준비를 거쳐 창조된다.
○“집에 처박혀 게임 폐인 되는 것보단 낫죠”
이제 지나가는 시민들도 플래시몹을 무조건 적대시하지는 않는다. 뿌냐(19·여)는 “잃어버린 개미를 찾아달라는 몹을 할 때 ‘내가 찾아줄게’라며 받아주는 시민은 많았어도 짜증내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여전히 플래시몹을 제대로 이해해 주는 사람은 드물다. “대부분은 미친 짓이라고 말해요.” 반해(18·여)는 “길거리에서 하는 이상한 행동이라는 편견이 강하다”고 말했다.
음치대마왕이 되묻는다. “쳇바퀴처럼 굴러가는 일상에서 잠시 일탈해 해방감을 느끼는 게 하루 종일 집에서 게임하는 폐인 되는 것보단 훨씬 낫지 않아요?” 엄마친구딸이 거든다. “몹에 열중하면 페르소나(타인에게 비치는 자신의 인격이나 이미지)가 없어지는 걸 느끼죠. 그때 느끼는 쾌감이 그렇게 이상한가요?”
○ 오후 6시 반… “웃지마, 서로 알은 척하면 안 되잖아”
플래시몹 시작 한 시간 전. 약속장소와 행동이 담긴 지시서를 나눠줄 시간이다. 신촌지하철역 1번 출구와 현대백화점 정문 앞에 모버레이터들이 섰다. 몹 참가자들이 이들을 알아 보고 슬며시 베개가 담긴 가방을 보여 준다. 이게 암호다. 오후 7시. 최종 점검을 위해 모버레이터들이 다시 모였다. 이츠쇼타임이 각자 역할을 최종 확인한다. 신입 모버레이터인 minister(18)가 한 참가자를 알아 보고 손을 흔들자 음치대마왕의 ‘불호령’이 떨어진다. “알은 척하면 안 되는 거 잊었어!”
○ 오후 7시 40분… 엄격한 의미가 창조하는 무의미의 역설
플래시몹이 끝났다. 이모(29·직장인) 씨가 묻는다. “무슨 일인지 궁금해 내내 지켜봤는데 아무런 의미도 찾을 수 없네요. 어린 친구들의 치기인가요?”
엄격한 원칙과 조직적인 준비가 만들어내는 무의미한 놀이의 역설. 그것이 플래시몹이다.
윤완준 기자 zeitung@donga.com
※이 기사의 취재에는 본보 대학생 인턴기자 장재혁(25·서울대 지리학과 4년) 씨가 참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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