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붓은 피만큼 진하네요”

  • 입력 2007년 1월 29일 02시 58분


이종상(가운데) 성순득 씨 부부와 아들 도수 씨(오른쪽)가 활짝 웃고 있다. 그림 중 왼쪽은 성 씨의 ‘월야독도’, 오른쪽은 이 화백의 ‘원형상-시원’. 박영대 기자
이종상(가운데) 성순득 씨 부부와 아들 도수 씨(오른쪽)가 활짝 웃고 있다. 그림 중 왼쪽은 성 씨의 ‘월야독도’, 오른쪽은 이 화백의 ‘원형상-시원’. 박영대 기자
이석주-사라 부녀의 작품. 아버지의 그림(위)과 딸의 그림이 닮았다. 사진 제공 한국미술센터
이석주-사라 부녀의 작품. 아버지의 그림(위)과 딸의 그림이 닮았다. 사진 제공 한국미술센터
■ ‘한국 미술의 화연’전 출품한 이종상 화백 가족

“글쎄, 미술에 때수건이 뭡니까. 어떤 때는 쥐어박고 싶지만 하도 고집이 세서.”(아버지 이종상 화백·69)

“목욕탕에서 아버지 등 밀어 드리던 거예요. 우리네 정겨움의 상징입니다. 사람과 사람의 관계를 말하는 것이고요.”(아들 도수 씨·36)

미술 가족 17팀이 출품한 ‘한국 미술의 화연(畵緣)’전이 열리는 서울 종로구 인사동 한국미술센터. 이곳에서 난데없이 이 화백 부자 간에 때수건 논쟁이 벌어졌다. 아버지와 아들의 작품이 나란히 걸려 있는데, 때수건을 소재로 한 아들의 작품 ‘인과’를 아버지가 못마땅하게 여긴 것이다. 한국화단의 거목인 이 화백이 “아들이 아니라면 어디 내 그림하고 나란히 걸겠느냐”며 너털웃음을 터뜨리자, 아들은 “영광일 뿐”이라고만 말했다.

전시에는 이 화백의 부인 성순득(67) 씨도 출품했다. 성 씨도 이화여대 동양화과를 나온 작가. 이 화백은 “나 때문에 (아내가) 그리고 싶은 만큼 못 그렸다”며 “이상범 서세옥 선생께 나보다 먼저 배웠고 내가 늘 뒤따라갔다”고 말했다.

이들 부부가 나란히 그림을 전시한 것도 처음이다. 성 씨는 “내 그림이 어디 비할 바가 되겠느냐”며 웃었다. 성 씨는 인터뷰 내내 부자 간의 이야기를 흐뭇한 표정으로 들을 뿐 자기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평생 이 화백의 아내라는 자리를 지켜 온 그대로였다.

“어려웠던 시절, 같이 그림을 그리자고 해도 ‘화선지 하나면 이틀치 콩나물을 살 수 있는데’ 하며 미뤘어요. 철없는 남편은 그 화선지를 물 쓰듯 했고…. 지금에야 고백하지만 ‘고맙소!’”(이 화백)

성 씨는 독도를 담은 ‘월야독도’를 선보였다. 독도 진경(眞景)은 이 화백이 30여 년간 그려 온 것이다. 이로 인해 빚어진 에피소드 하나. 도록 제작사가 독도 그림은 당연히 이 화백의 작품이라고 생각하고 묻지도 않고 인쇄하는 바람에 첫 1500부를 모두 버려야 했다.

아들 도수 씨는 미국 대학과 대학원에서 컴퓨터 사이언스를 전공한 뒤 뒤늦게 미술에 입문했다. 아버지는 뒤를 이었으면 했으나 강요하진 않았다. 인터뷰 중간 즈음에 아버지는 “오래전부터 하고 싶은 말이었는데 지금 털어놓겠다”며 아들을 봤다.

“1995년 내가 참가했던 ‘베니스 비엔날레’에 ‘통역이나 해 달라’며 널 데리고 간 게 ‘작전’이었어. 그곳에 가면 뭔가 느끼는 게 있을 것 같았지.”(아버지)

“아! 그것도 모르고. 백남준, 세자르 발다치니 등 세계적 거장과 함께 밥먹은 것만 친구들한테 얼마나 자랑했는데. 하지만 컴퓨터 전공자로서 그때 본 작품들이 인상적이었어요. 제가 미디어 아트를 한 것도 그 덕분이고요.”(아들)

아들은 미디어 아티스트로 활동하면서 2004년 광주비엔날레 참여작가로 초대받기도 했다. 그는 “아버지께 작품에 대한 조언도 많이 듣지만 무엇보다 작가의 자세와 철학을 배운다”며 “이는 작가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것”이라고 말했다. 아버지는 “우리 세대는 다음 세대의 징검다리가 될 뿐”이라며 “아들한테 컴퓨터 등 배운 것도 많다”고 말했다. 이 화백은 자체 서버를 두고 홈페이지를 직접 운영한다.

이들 가족은 한지붕 아래에 산다. 두 층으로 된 빌라에서 아래층에는 국립국악원 정악단 부수석(가야금)인 딸 유나(40) 씨 가족이, 위층에는 이 화백 내외와 아들 부부, 손자가 함께 산다. 이 화백은 “내가 평생 고구려 벽화와 독도를 파고든 이유가 전통과 역사 의식에 대한 성찰이었다”며 “가족은 한울타리에 살면서 부모의 철학, 한 가정의 인연을 이어 나갈 수 있다”고 말했다.

‘한국미술의 화연’전에는 이인실 장현재 모녀, 하태진-연수, 이석주-사라 부녀, 이두식-하린 부자 등이 참여했다. 서로 다르면서도 묘하게 닮은 ‘가족의 작품’에서 훈훈한 정이 우러나오는 전시다. 2월 20일까지. 02-725-9467

허 엽 기자 he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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