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슬 퍼런 일제의 식민지배가 조선 문화를 파괴하고 말살하던 시절이었다. “조선 문화의 중심인 광화문을 옮기는 것은 야만”이라는 그의 용기 있는 발언은 돌발적인 것이 아니었고 조선 예술에 대한 깊은 식견과 확고한 소신에서 나온 것이었다.
조선의 美를 사랑한 일본인들
야나기는 해군 소장을 아버지로 둔 명문가 출신으로 도쿄대 철학과를 나와 종교 철학에 심취했던 지식인이었다. 그는 한국인이 아닌 ‘타인의 시각’으로 우리 전통미를 체계화한 인물이다. 조선 예술에 대한 다양하고 깊이 있는 그의 저술은 한국의 아름다움을 연구하는 국내외 학자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야나기와 조선 예술의 만남은 25세 때인 1914년 아사카와 노리타카라는 조선도자기 전문가가 그의 집을 방문하면서 이뤄졌다. “노리타카가 우리 집에 오면서 조선 백자 항아리 하나를 선물로 갖고 왔다. 이때부터 나는 조선 예술에 마음이 끌리게 됐다.” 야나기의 회고담이다.
이번 전시회는 그가 평생 수집한 한국과 일본의 민예품뿐 아니라 그와 관련된 다큐멘터리 자료도 선을 보이고 있다. 전시회를 찾은 사람들은 야나기라는 인물이 걸어온 길에 깊은 감동을 나타낸다.
야나기를 아는 후대 사람들은 주로 이론가나 철학자로서 그를 바라보고 평가하고 있다. 서울에서 그의 전시회가 열리고 있는 이 시점에 새롭게 조명되어야 할 것이 행동가와 실천가로서의 면모다. 조선 공예품을 수집 전시하는 조선민족박물관을 설립하는 과정에서 그가 보였던 추진력은 놀라웠다.
야나기는 조선 총독 사이토 마코토를 찾아가 박물관을 만들 장소를 경복궁 안에 얻어 냈다. 사이토는 그의 아버지의 해군 후배였다. 그는 “사라져 가는 조선의 민족예술을 지키자”고 외치며 설립 운동에 나섰다. 성악가인 부인 가네코는 기금 마련 독창회를 열었다.
1921년 6월 4일자 동아일보는 첫 독창회에 앞서 “주인 된 우리의 체면으로 남의 일 보듯 가만히 있기는 참으로 어려운 일”이라며 조선 사회의 적극 참여를 호소하고 있다. 이후 동아일보는 가네코의 독창회를 여러 번 주최한다.
3·1운동 직후 그는 “우리는 지금 올바른 사람의 길을 가고 있지 않다”며 일본 정부를 몰아세웠다. 일제가 광화문을 파괴하려 할 때는 성경까지 인용해 가며 “저들은 지금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모릅니다”라고 강하게 비판했다.
비록 소수였지만 그의 곁에는 여러 ‘동지’들이 있었다. 일본 지식인과 조선인들이 그를 지지했다. 그가 서울에 오면 남궁벽 염상섭 같은 문인들이 따듯하게 환영했다. 그는 유능하고 용감한 ‘주동자’였다.
되살려야 할 ‘문화적 기억’
그는 일본이 패망한 뒤인 1954년 이런 글을 썼다. “나는 언제나 한국의 작품을 곁에 두고 지낸다. 나는 한때 일본 경찰에 ‘위험인물’로 등록되어 형사의 미행까지 받는 몸이 되었지만 한국인으로부터의 감사는 충분한 보상이 되었다. 생각해 보면 나 자신이 한국의 민예품으로부터 얼마나 많은 것을 배웠으며 마음이 얼마나 윤택해졌는지 모른다.”
그와 친구들에 대해 우리는 너무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것 같다. 그의 인간적 체취를 느낄 수 있는 본격적인 전시회는 이번 일민미술관 전시회가 처음이다. 1961년 그가 세상을 떠난 지 45년 만에 이뤄진 행사다. 야나기는 평생 한국을 기억하고 한국 예술을 진심으로 사랑했다. 이제는 우리가 그를 기억할 차례다.
홍찬식 논설위원 chansi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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