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넓은 꽃밭. 형형색색으로 만발한 꽃 주위를 날아다니는 나비와 벌들.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답다. 그러나 그건 착각이라고 말하는 책이 있다.
저자는 꽃과 곤충은 목적을 위해 상대를 속이고 속는 관계라고 말한다. 이 관계가 150여 장의 컬러 사진, 익살스러운 관찰일지를 담은 삽화와 함께 펼쳐진다.
단연코 주인공은 꽃. 이 책에서 꽃이 유감없이 보여 주는 기만술과 변장술은 단 한 가지 목적을 위해 이뤄진다. 바로 효과적인 꽃가루받이, 곧 생존이다.
생존의 방식은 가능한 한 곤충에게 꿀을 덜 빼앗기고 꽃가루는 최대한 묻혀 보내는 것.
심지어 꽃가루받이를 위해 곤충의 목숨을 빼앗는 꽃도 있다. 꽃가루받이 과정이 재미있다. 여러해살이풀인 천남성은 기다란 포(苞·꽃대나 꽃자루의 밑을 받치고 있는 녹색 비늘 모양의 잎) 아래쪽에 꽃이 달려 있다.
수꽃에 버섯파리가 찾아온다. 대롱 모양의 포 안으로 미끄러진 버섯파리는 잘고 하얀 꽃가루를 뒤집어쓴다. 죽음을 목전에 둔 파리, 자포자기한다. 그러나 이게 웬일인가. 포 아래 작은 틈새가 있다. 곧장 탈출한다.
꽃가루를 묻힌 버섯파리는 어리석게도 천남성 암꽃에서 어슬렁거리다가 또다시 포 안으로 미끄러진다. 비정하게도 암꽃의 포에는 탈출 구멍이 없다. 수꽃에서 꽃가루를 묻혀 암술까지 가져왔으니 더는 쓸모가 없기 때문이다.
아프리카 마다가스카르 섬에서 자라는 난초과의 세퀘페델라풍란. 나방의 한 종류인 긴입갈색박각시가 꽃가루를 많이 묻힌 뒤 꿀을 얻어 가도록 하기 위해 이 꽃의 꿀주머니 역할을 하는 관이 25∼30cm로 길어졌다. 반대로 긴입갈색박각시는 꽃가루를 묻히지 않고 편하게 꿀을 얻으려 하면서 주둥이가 30cm로 길어졌다.
저자는 정통 식물학자는 아니다. 귀금속 세공사로 일하면서 꽃 생태학을 연구해 온 아마추어 식물학자. 하지만 아마추어 연구자로는 처음으로 일본화분학회 학술상을 받았다.
저자는 꽃에 대한 호기심과 열정이 자신을 산과 들로 이끌었다고 말한다. 이 책도 마찬가지다. 집에서 몰두하며 볼 책이 아니다.
친절하게도 꽃 관찰을 위한 준비물을 꼼꼼히 소개해 놓았다. 다가오는 봄, 곤충과의 사투에 여념이 없는 야생화를 관찰하는 재미를 느껴 보는 것도 좋겠다.윤완준 기자 zeitu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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