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강남구 삼성동의 한 모델학원. 밤늦게 워킹연습 중인 모델 지망생 윤경(20·여) 씨를 만났다. 키 177cm, 몸무게 61kg에 앳된 얼굴. 누가 봐도 건강한 글래머 미인이지만 본인은 “모델치고는 뚱뚱한 편”이라며 한숨을 쉰다.
“연예인이 되려면 성형수술을 해야 한다는 말을 자주 들어요. 수술은 싫은데…. 키가 크니까 먼저 모델로 성공한 다음 방송에 나가고 싶어요.”
성형수술의 유혹은 뿌리쳤지만 다이어트의 압박은 여전하다. 학원 친구들 앞에서 체중계에 올랐다. 감추고 싶은 군살 탓인지 생각보다 수치가 높게 나왔다. ‘무조건 빼라’는 소리를 들었다.
서울 강남구 신사동에 있는 또 다른 모델학원. 수강생 중 70%가 10대 청소년이다.
지방 출신인 최모(17·고2) 양은 “케이블 TV와 잡지를 보며 모델의 꿈을 키웠다”면서 “부모님을 설득해 친척 집에 머물고 있다”고 말했다.
화려한 패션쇼와 스포트라이트, 스타를 향한 열망. 모델 지망생이 급증하면서 과도한 다이어트로 살 빼기에만 집착하는 ‘마른 모델’의 부작용을 걱정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한창 성장할 시기인 10대에 무리한 다이어트를 하면 정신적 육체적으로 자신을 망칠 위험이 크다는 게 전문가들의 충고. 실제로 지난해 거식증으로 사망한 브라질 모델은 10대 시절부터 다이어트 중독증에 빠져 있었다.
또 마른 모델만을 선호하는 패션계의 풍토는 다수의 일반 청소년에게 미(美)에 관한 왜곡된 인식을 심을 소지가 크다. 백상식이장애클리닉 강희찬 원장은 “신체의 변화를 겪는 시기에 잘못된 이상형에 빠지면 부작용에 개의치 않고 온갖 무리한 행동을 하게 된다”고 지적했다.
○ 국내에 부는 마른 모델 열풍
모델 지망생 장취하(22) 씨는 5kg 감량이 목표다. 하루 세끼를 죽으로 때운다. 그것도 천천히 조금 먹기 위해 젓가락만 사용한다. ‘다행히’ 얼마 전 몸살에 걸려 3kg이 절로 빠졌다.
“패션이 좋아서 뒤늦게 시작했어요. 색깔 있는 모델이 꿈이지만 그래도 기본 체형은 갖춰야 한다는 생각에 다이어트를 합니다.”
키 171cm로 또래보다 큰 이모(17·고1) 양. 케이블TV에 나오는 미국 슈퍼모델 타이라 뱅크스가 멋있어 보여 모델학원을 찾았다.
요즘 10대 청소년들은 인터넷과 케이블TV 등을 통해 해외의 유명 패션모델을 자주 접한다. 이들은 모두 말랐다. 팝스타 라이어넬 리치의 딸 니콜은 늘 거식증 의혹이 따라다닌다.
하지만 그들의 마른 몸매는 패션모델 지망생들의 꿈이다.
모델 지망생 인터넷 카페의 ‘자질 테스트’ 코너에는 주로 10대 청소년들이 자신의 사진과 신체 사이즈를 올린다. 심지어 초등학생들까지 살을 얼마나 빼야 하느냐고 묻는다.
카페를 운영하는 신인모델 김혜림(19·고3) 양은 “한예슬, 강동원 같은 모델 출신이 뜨면서 환상에 젖은 아이들이 늘었다”며 “이를 이용해 ‘길거리 캐스팅’ 명목으로 학원비만 챙기는 악덕 기획사도 많다”고 말했다. 그는 또 “사이비 기획사의 꾐에 속아 온갖 다이어트에 키 크는 수술까지 받다 건강만 해친 친구들도 여럿 봤다”고 덧붙였다.
모델업계는 175cm 이상에 55kg 미만을 모델의 기본 조건으로 보고 있다. 이상적인 조건은 178cm에 48∼50kg. 모델 사전에 ‘8등신 미인’은 없다. 12등신이 기본이다.
경쟁은 치열하지만 모델의 문은 좁다. 유명 기획사에서 운영하는 학원과정을 수료해도 해당 기획사와 계약하기는 하늘의 별따기. 용케 계약에 성공해도 직업 수명이 짧은 데다 언제 잊혀질지 모른다는 불안감을 떨치기 어렵다.
한 모델 지망생은 “경쟁자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몸무게를 재고 신체의 치부를 지적당하는 건 엄청난 스트레스”라며 “거식증으로 사망한 해외 모델 얘기가 남의 일 같지 않다”고 털어놓았다. 신인모델 정유진(18·고3) 양도 “일단 마르고 봐야 디자이너 눈에 띄고, 치열한 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는 인식이 팽배하다”고 말했다. 정 양은 175cm에 47kg.
베테랑 모델들의 노력도 눈물겹다. 자기관리는 모델의 숙명이기 때문이다. 한 남성모델은 무대에 서기 전 일주일 동안은 물을 입에 대지 않는다. 혹시 배가 출렁일까 걱정돼서다.
모델 8년차인 이순연(29) 씨는 “모델의 세계는 전쟁터”라며 “등산 요가 식이요법 피부관리 등 가리지 않고 몸을 위해 투자해야 한다”고 말했다.
치열한 경쟁이 심리적 부담으로 작용해 극단적인 결과를 초래하는 경우도 있다.
고교 2학년인 A 양은 CF모델로 데뷔했다. 마른 체형이지만 통통한 볼살이 고민이었다. 소속사는 다이어트를 권했다. A 양이 번 돈은 어려운 가정형편에 보탬이 됐기 때문에 부모도 살을 빼라고 은근한 압력을 가했다.
정신적인 부담을 견디지 못한 A 양은 무리한 다이어트를 시도하다 폭식증에 걸렸다. 일거리는 줄었고 또래 경쟁자들은 승승장구했다. 가정형편이 여의치 않아 그나마 받던 식이장애 치료조차 지속할 수 없는 상황에 빠졌다.
○ 청소년들의 미(美) 의식에 심각한 악영향
“(초등학교) 6학년인데요, 키가 160cm이고 몸무게는 51kg이에요. 제 생각에 51kg은 ‘돼지’라 38kg으로 만들고 싶은데…. 매일 저녁을 굶고 있어요….”
최근 초등학교를 졸업한 B (13) 양은 한 포털사이트의 질문검색란에 ‘깡마르고 싶다’며 글을 올렸다. B 양은 “인기모델 제마 워드만 봐도 삐쩍 마르지 않았냐”면서 “44사이즈가 아닌 여성이 노출 있는 옷을 입으면 사람들이 욕하는 것 같다”고 했다.
이 포털사이트에는 B 양처럼 깡마르고 싶다는 글이 수십 개가 넘는다. 특정 연예인을 지칭해 그들처럼 되고 싶다고 한다. 심지어 거식증에 걸리는 방법을 묻는 글까지 있다.
지난해 말에는 인터넷에서 ‘프로 아나(거식증 예찬론자)’ 블로그가 화제가 됐다. 아나는 거식증(anorexia)의 약칭. 차라리 거식증에라도 걸려서 마르고 싶다는 욕망의 분출인 셈이다.
전문가들은 마른 모델과 마른 연예인을 미화하는 듯한 사회 분위기가 청소년들의 미(美) 의식에 심각한 악영향을 미친다고 지적한다.
지난해 10월 다국적 생활용품 회사 도브가 15∼17세의 한국 여자 청소년 100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결과 77%가 외모에 대한 불만족으로 외부활동을 꺼린다고 답했다. 59%가 성형수술을 할 용의가 있다고 답했으며 3%는 체중 관리를 위해 먹은 걸 토하거나 아예 먹지 않는다고 털어놓았다.
백상식이장애클리닉에 따르면 전체 거식증 환자 가운데 만 18세 이하 청소년이 30%가 넘는다. 이 병원 강희찬 원장은 “거식증은 대개 자존의식이 낮은 사람에게 발병하기 쉽다”면서 “성적부진과 원만치 못한 대인관계로 생긴 열등감을 체중감량을 통해 해소하려다 병에 걸린 사례가 적지 않다”고 설명했다.
일부 청소년이 체중감량을 일종의 성취로 여기고 다이어트를 통해 심리적 만족을 얻으려 한다는 것이다. 과거에는 스트레스와 열등감이 히스테리로 나타났지만 최근엔 거식증으로 발병하는 사례가 늘었다고 한다.
마음과마음 정신과 이정현 원장은 “엄청난 체중감량을 감행한 연예인과 모델을 성공사례로 꼽는 풍조가 만연할수록 청소년들은 비만인 사람은 실패자이고 마른 사람은 자기관리를 잘하는 사람으로 인식한다”고 말했다.
○ 마른 몸매에 집착하는 풍토 사라져야
“너무 마른 모델은 패션쇼 무대에 세우지 않겠습니다.”
마른 모델의 폐해를 걱정하는 여론이 높아지자 한국의 대표 디자이너인 앙드레 김이 지난달 30일 몸매에 집착하지 않고 건강미와 개성이 넘치는 모델을 기용하겠다고 선언했다. 앙드레 김의 발언은 깡마른 모델의 패션쇼 출연을 규제하려는 해외 패션계의 움직임과 맞물려 국내에서도 새로운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국내 최대 디자이너 단체인 서울패션아티스트협의회(SFAA)의 박윤수 전 회장도 “디자이너에게 모델은 몇 달 동안 심혈을 기울인 작품을 표현해줄 사람”이라며 “무조건 마른 모델만 선호한다는 것은 오해”라고 말했다.
모델업계 관계자들은 마른 모델 논란을 해결하려면 무엇보다 ‘옷에 사람을 맞추는’ 풍토가 사라져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모델센터 도신우 회장은 “말라야 어울리는 패션이 요즘 트렌드”라며 “디자이너가 마른 체형을 원하면 모델은 따를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인기모델 박둘선 씨도 한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마른 모델은 디자이너와 패션시장이 만들었기 때문에 모델만의 책임으로 돌리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밝혔다.
20대 초반 한국 여성의 표준은 55사이즈(키 160∼162cm, 허리둘레 66cm, 엉덩이 91cm 등). 실제로 이 연령대의 30∼40%가 55사이즈에 속한다. 44사이즈는 신체부위별로 이보다 3∼5cm 작다.
그런 점에서 의류업계도 과도한 다이어트를 부추긴다는 비판에서 자유롭지 않다. 유행을 선도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지나치게 몸에 붙는 스타일의 제품을 내놓는 바람에 고객들은 새 옷을 입기 위해 살을 빼야 하는 처지가 됐다.
동서울대 디자인학과 최경미 교수는 “재킷 단추가 겨우 잠길 정도의 날씬한 라인이 인기”라며 “재킷의 소매통 둘레가 예전보다 4∼5cm 줄었다”고 설명했다. 그는 “서울 강남지역을 겨냥하는 고급 브랜드는 중년 여성 사이즈도 20대 초반 기준으로 옮겨가는 형태”라고 귀띔했다.
엉덩이보다 허벅지에 살이 많은 한국 여성의 특징 때문에 바지 사이즈와 실제 체형 간의 괴리는 더 심각하다.
동덕여대 모델학과 김동수 교수는 “모델 출신인 나도 작아서 못 사는 옷이 많다”며 “의류업체들은 사이즈의 폭을 넓히는 노력을 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지난해 투산 광고모델로 인기를 끈 모델 오지영 씨는 “모델치고 통통한 편이라 억지로 살도 빼봤지만 어울리지 않아 도로 찌웠다”며 “자신의 개성을 받아들이고, 이를 장점으로 만드는 태도가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글=김현수 기자 kimhs@donga.com
사진=안철민 기자 acm08@donga.com
■“살 빼려다 사람 잡는다” vs “패션은 꿈을 파는 산업”
‘마른 모델 퇴출’ 요구에 패션업계 반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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