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호각을 만들면 비바람을 막을 수 있을 것 같지만 문화재의 경관을 훼손하고 그 매력을 떨어뜨릴 것 같기도 하고….”
문화재는 길게는 수만 년 전, 대부분은 수천 년 전부터 수백 년 전 사이에 만들어진 것이다. 이렇게 오랜 세월을 견디다 보니 손상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특히 야외 석조 문화재의 경우, 비바람에 그대로 노출되어 왔기 때문에 다른 문화재보다도 손상이 심각한 편이다.
그래서 보수 보존 작업이 끊임없이 이뤄진다. 하지만 보수 보존은 매우 민감하고 어려운 작업이다. 석탑을 해체 복원했으나 조립 과정의 부실로 더 위험해졌다는 지적을 받기도 하고, 당시로서는 잘해 보겠다고 시도한 보수였지만 결과적으로 잘못된 보수로 판명되는 경우도 종종 있기 때문이다.》
석굴암…본존불 천장 외부 시멘트 씌울까 말까
○ 온도차로 내부에 습기 생겨 에어컨 설치
1913년 조선총독부는 일부가 무너진 채 방치돼 있던 석굴암(774년·국보 24호)을 보수 복원했다. 그리고 1964년 국내의 문화재 전문가들은 이를 다시 보수했다.
1964년 당시 문화재 전문가들은 석굴암 보수공사를 하면서 본존불 천장 외부를 시멘트 콘크리트로 덮어 씌웠다. 빗물이 내부로 흘러들어 오는 것을 막겠다는 명분이었다.
그러나 그로 인해 내부와 외부의 온도 차가 커져 석굴암 내부에 습기가 더 많이 차고 결로(結露) 현상이 발생하고 말았다. 급기야는 1966년 내부의 습기를 제거하기 위해 에어컨을 설치하는 진풍경까지 연출해야 했다.
당시 콘크리트를 선택한 것은 현대식 토목공학을 이용해 더 잘 보수하겠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었다. 막상 결과는 정반대로 나타났다. 1200여 년 전 통일신라 때보다 지금의 토목건축 기술이 훨씬 뛰어날 텐데, 왜 이런 일이 발생한 것일까. 자연을 무시했기 때문이다. 자연 속에서 자연과 함께 생명을 유지해 온 석굴암에 시멘트 콘크리트와 같은 인공 재료를 사용하려 했던 발상이 문제였다. 콘크리트는 애초부터 석굴암과 어울릴 수 없는 재질이었다. 현대 공법의 보수도 중요하지만 친환경적인 원래의 상태를 고려하지 않고 너무 안이하게 생각한 결과였다.
백제 미륵사터 석탑…해체, 옳은가 그른가 9층이냐 6층이냐
국내 최고(最古) 최대(最大) 석탑인 국보 11호 백제 미륵사터 석탑(7세기 초)도 붕괴 우려가 높다는 전문가들의 판단에 따라 현재 해체 복원 중이다.
미륵사터 쌍탑 가운데 하나인 이 서쪽 석탑의 해체 이전 모습(높이 14.2m)은 위태롭기 그지 없었다. 원래 9층이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이 탑은 상당 부분이 부서진 채 6층까지만 남아 있는 상태였다.
1910년경 탑의 일부가 붕괴되자 더 이상의 피해를 막기 위해 1915년 일제는 시멘트 콘크리트를 덧씌워 놓았다. 그러나 탑의 손상을 멈추지 못했다. 석재의 강도는 약해졌고 남아있는 부분도 부서지고 금이 가 언제 붕괴될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1990년대 들어 미륵사터 탑을 해체 보수 복원해야 한다는 의견이 대두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뜨거운 논란이 일었다. “위험한 상태에서 시멘트를 제거하고 해체에 들어갈 경우, 자칫 더 큰 파괴를 가져올 수 있다”는 반대론과 “언제 무너질지 모르기 때문에 서둘러 해체 복원해야 한다”는 찬성론이 팽팽히 맞섰다. 수년 동안 결론을 내리지 못한 채 격론이 거듭되었다. 마침내 1997년 해체 보수로 결론이 났다.
2001년 10월 6층부터 해체작업에 들어가 현재는 1층을 해체 중이다. 해체작업은 내년까지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7년이나 걸리는 해체 과정도 어려운 작업이지만 정작 더 어려운 것은 해체한 탑을 다시 쌓아 올리는 일이다. 특히 9층까지 복원할 것인지, 아니면 해체 직전의 모습(일부 붕괴된 상태의 6층까지)대로 복원할 것인지 그 기준을 정해야 한다. 미륵사터 탑의 원형을 정확하게 모르는 상황에서 9층까지 복원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현재로선 해체 직전의 상태로 복원하는 방안이 가장 유력하지만 이 역시 해체 보수의 어려움이자 딜레마라고 할 수 있다.
원각사터 10층 석탑…유리 보호각 설치 잘한 건가 아닌가
서울 탑골공원에 위치한 국보 2호 원각사터 10층 석탑(1467년·높이 12m). 이 탑엔 유리 보호각이 씌워져 있다. 석탑을 유리로 완전히 감싸 놓은 것은 유례가 없는 일. 어떻게 이런 일이 생겼을까.
이 탑은 대리석 재질이기 때문에 보통의 화강암 탑에 비해 약하고 부드럽다. 그래서 손상도 빠르다. 게다가 산성비와 비둘기 배설물 등으로 인해 손상이 심각해졌다.
1999년부터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전문가들이 머리를 맞대고 아이디어를 찾았다. 그 아이디어가 유리 보호각이었다. 2000년 서울시는 문화재위원회의 승인 아래 유리 보호각을 만들어 탑을 완전히 덮어씌웠다.
유리각을 씌우는 것을 놓고 찬반 논란이 있었다. 그러나 별 다른 대책이 없다는 것도 엄연한 현실이었고 그래서 전문가들은 유리각을 선택했다.
탑을 야외에 노출시키지 않고 유리각으로 감쌌으니 어쩌면 완벽한 보존처리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실제 이 탑을 보는 사람들은 답답하고 안쓰럽다. 야외에 있어야 할 탑의 본질적인 가치를 잃어버린 셈이다. 유리각을 씌운 탑에서 어떻게 문화재의 참 맛을 느낄 수 있겠는가.
서산 마애삼존불…목제 보호각 걷어낼까 말까
백제의 미소로 유명한 국보 84호 충남 서산 마애삼존불(6세기 말∼7세기 초)에는 목제 보호각이 설치되어 있다. 비바람으로부터 마애불을 보호하기 위해 1965년에 세운 것이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문제가 발생했다. 보호각과 암벽 접합 부위의 시멘트 콘크리트가 빗물에 녹아내리면서 바위를 뿌옇게 변색시키기 시작한 것이다. 또한 보호각 속에 마애불을 가두어 놓다 보니 통풍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아 내부에 습기가 차는 등 마애불의 보존 관리에 역효과를 초래하고 말았다.
더욱 심각한 문제점은 보호각이 관람을 방해한다는 사실이다. 보호각 내부가 어두침침해 마애불의 아름다운 미소를 제대로 감상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이 같은 지적이 제기되자 2006년 문화재청과 서산시는 보호각 가운데 기둥과 지붕만 남겨놓고 벽체와 문을 모두 철거했다. 그 후 자연 채광과 통풍이 가능해졌다. 하지만 기둥과 지붕만 남은 보호각은 그 모습이 어색해 마애삼존불의 경관을 해치는 또 다른 문제점을 낳았다.
이에 따라 문화재청은 최근 기둥과 지붕까지 모두 철거하고 대신 자연 채광이 가능한 투명 재질로 입구 위쪽에 비가림막만 설치하기로 결정했다. 이르면 내년부터는 마애삼존불의 아름다운 미소를 원래 모습대로 감상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마애삼존불을 보호하기 위해 설치한 목제 보호각이 오히려 불상을 훼손하다 40여 년 만에 사라지게 된 것이다. 이는 문화재를 바라보는 시각이 시대에 따라 변했음을 의미한다. 또한 야외 석조 문화재의 보수 보존의 어려움과 딜레마를 잘 보여 주는 사례이기도 하다.
이광표 기자 kplee@donga.com
▼경천사 10층석탑의 수난▼
서울 용산 국립중앙박물관 중앙홀에 가면 국보 86호 경천사 10층 석탑(1348년·높이 13.5m·사진)이 서 있다. 국보 2호 원각사터 10층석탑과 모양이 흡사한 이 탑은 늘씬한 몸매, 세련된 모양의 탑신(塔身·몸체)과 옥개석(屋蓋石·지붕돌), 다양하고 화려한 조각 등 이색적인 아름다움을 자랑한다.
1907년경 日대신이 일본으로 약탈해가
그런데 야외에 있어야 할 이 탑이 실내로 들어간 것은 어떤 연유에서일까.
이 탑은 원래 북한 지역인 개성시 부소산의 경천사에 있었다. 그러나 1907년경 한국을 방문한 일본의 궁내 대신 다나카 미쓰야키(田中光顯)가 “고종이 이 탑을 하사했다”고 속이곤 탑을 해체해 일본으로 약탈해 갔다.
1918년 비난 여론 높아지자 국내 반환
그 후 비난 여론이 비등해지자 다나카는 1918년 이 탑을 한국에 돌려보냈다. 하지만 탑은 많이 훼손된 상태였다. 게다가 반환 이후 별다른 보존 조치 없이 해체된 상태로 서울 경복궁 회랑에 방치되었다.
1960년 비과학적 복원…경복궁 전시
사람들은 이 탑에 별다른 눈길을 주지 않았고 그렇게 40여 년이 흘렀다. 문화재 전문가들이 이 탑의 존재를 깨닫고 보수에 들어간 때가 1959년. 1년간의 작업 끝에 1960년 탑을 복원해 경복궁 경내에 전시했으나 그것은 탈락 부위를 시멘트 콘크리트로 메우는 정도에 그친 비과학적이고 부실한 보수 복원이었다.
1995년 손상 계속되자 해체보수 결정
경천사 10층 석탑은 복원 이후 경복궁 야외에 전시되면서 풍화작용과 산성비 등으로 인해 손상이 계속되었다. 더 손상되면 심각한 문제를 초래할 수 있다는 판단에 따라 국립문화재연구소는 1995년 해체 보수를 결정했다.
탑의 142개 부재를 모두 해체한 뒤 보수작업에 들어갔다. 대리석 부재를 강화 처리하고 금이 간 곳을 에폭시 수지 접착제로 붙였다. 1960년 보수 때 채워 넣었던 시멘트를 제거하고 레이저를 이용해 표면의 오염물도 닦아 냈다. 부재 가운데 심하게 손상된 64개를 새로운 대리석으로 교체했다. 그 과정에서 이 탑을 다시 세울 장소는 새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정해졌다. 야외에서의 손상을 막기 위해 실내에 전시하기로 결정한 것이었다.
2005년 대전 문화재硏서 용산 옮겨 조립
보수 보존 처리를 마친 부재들은 2005년 초 대전의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 중앙박물관으로 옮겨져 조립에 들어갔다. 수직과 수평의 균형을 잡아가며 142개나 되는 부재를 쌓아올린다는 건 고난도의 작업이었다. 중앙박물관 개관을 앞둔 2005년 8월 무사히 조립을 마침으로써 10년간의 대장정이 마무리됐다. 계속되는 해체의 시련을 겪으면서 개성에서 일본, 서울, 대전으로 전전했던 유랑 100년을 마감한 것이다.
이광표 기자 kpl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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