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강토 곳곳의 문화유산 현장에 있는 안내문을 읽을 때마다 느끼는 아쉬움이 있다. 몇 년에 세워진 뒤 어느 해 불탔다가 언제 중건됐다는 천편일률적이고 무미건조한 설명 안에 빠져 있는 이야기(스토리)에 대한 갈증 때문이다.
1990년대 나온 ‘나의 문화유산답사기’류의 글들은 이런 갈증을 적셔 줬다. 문화유산이 왜 소중하고 아름다운지를 걸쭉한 이야기로 풀어냈기 때문이다. 그 덕분에 문화유산답사 붐이 일어났다. 수학여행과 신혼여행에서 사진 촬영의 배경으로 등장하던 궁궐, 사찰, 탑이 미학적 관찰의 대상이 됐다.
문화유산 현장의 주인공이 관광객에서 문화유산으로 전환된 것이다. 그러나 문화유산의 가치를 증폭시키기 위해선 또 한 번의 전환이 필요하다. 바로 이야기가 그 무대의 주인공이 되는 것이다. TV 사극의 세트장이 인기 관광지가 되는 이유도 거기에 숨어 있다.
국문학계 원로인 조동일 계명대 석좌교수가 펼쳐 낸 이 문화유산답사기의 주인공은 ‘텍스트’로서 이야기다. 비문과 명문, 한시, 기행문, 고전소설 그리고 삼국유사 등에 채취된 전설들이다.
저자는 이 텍스트를 통해 이야기가 투사된 풍경의 힘이 어떻게 마술이 될 수 있는가를 보여 준다. 눈과 귀를 충족시키는 ‘바깥의 풍경’을 넘어서 마음과 뇌리를 사로잡는 ‘의식의 풍경’을 펼쳐 내기 때문이다.
풍광 좋기로 소문난 경북 영주 부석사 편을 보자. 저자는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이나 배흘림기둥의 미학을 이야기하지 않으면서 부석사 무량수전에 오르는 5가지 방법을 이야기한다. 첫째는 그 풍경에 취해 오르는 것이다. 둘째는 부석사에 얽힌 전설을 음미하는 것이다. 중국유학 시절 의상을 사모해 바다의 용이 되어서 의상의 귀국길을 지켰다는 ‘선묘’라는 중국 처녀의 전설은 놀랍게도 한중일 공통의 국제적 전설이었다.
마지막은 의상의 화엄사상을 몸으로 체험하는 것이다. 올라갈수록 시야가 더 열리게 배치된 전각의 구조는 깨달음에도 하품과 상품이 있음을 알려 주고, 곧게 올라가기보다 왼쪽으로 틀어놓는 담을 배치함으로써 그 깨달음에는 비약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우쳐 준다.
경북 경주시 외동의 감산사 터에서 발굴돼 국립중앙박물관에 전시 중인 국보 81호와 82호 불상 뒤에 새겨진 명문을 주목하는 이들은 거의 없다. 67세 나이에 벼슬길에서 물러난 김지성이 쓴 명문은 부모의 명복을 빈다면서 자신의 내면세계를 담았고, 불가 형식의 글에 유가로서의 자부심과 도가에 대한 열망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파격적이다. 6두품으로서 신분의 제약과 불교 중심의 종교적 제약을 동시에 뛰어넘었다는 점에서 저자는 이 글을 ‘성덕대왕신종명’과 더불어 신라문학의 최대 걸작이라고 설명한다. 자비로운 불상의 뒤에 ‘배반의 장미’가 숨겨져 있던 셈이다.
허구적 이야기와 실재적 풍광 사이에 벌어지는 역학관계에 대한 성찰도 담겼다. 춘향의 진면목이야말로 스스로의 운명을 개척한 자유정신에 있음에도, ‘춘향전’이라는 이야기가 되레 현실에선 도덕적 열녀로 포장되는 역설적 현상을 집어낸다. 충남 논산시의 은행나무 앞에서 ‘전우치전’이라는 소설은 실존 인물 전우치가 역모죄로 몰려 옥사한 뒤 가문의 화를 면하기 위한 궁여지책으로 전설화됐을 가능성을 찾아낸다.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