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 영하의 겨울 라다크에서부터 시작해서 폭염의 여름 뭄바이까지 와 있습니다.
집에 돌아갈 날짜를 기다리며 찻집에 앉아 창밖을 봅니다. 이제 건강해지셨는지…라자스탄 어디쯤에서 전화를 드릴까 하다가 생각만 오래 하고 말았습니다. 도시를 바꿀 때면 환생하는 느낌이네요, 여기는. 2007년 2월.”
이런 편지를 받는 것이 대체 얼마 만인가요? 이 짤막한 사연을 몇 번이고 반복하여 읽으면서 낯선 도시의 찻집이나 어느 건물의 볕 좋은 계단에 앉아 엽서를 쓰는 여행자의 구도자와도 같은 마음이 되어 봅니다. 편지는 오래 걸려 도착했습니다. 그러나 편지는 내 귀중품 상자 속에, 그리고 내 마음속에 그보다도 더 오래 남습니다. 나는 쉬 증발하는 전화를 걸지 않고 읽고 또 읽을 수 있는 엽서를 보내 준 시인에게 감사합니다. 목적도 잊은 맹목의 뜀박질 속에서 편지는 문득 걸음을 멈추고 지나온 길을 뒤돌아보며 사람과 삶의 의미를 생각해 보게 합니다.
왜 우리는 이제 편지를 쓰지 않게 되었을까요? 우리는 왜 방 안에서, 길에서, 지하철에서, 식당에서―심지어 회의 중에도―남들이 듣건 말건 늘 휴대전화에 대고 수다만 떨고 있을까요? 상대방의 아름다운 얼굴을 그려 보지도 않고, 남들은 전혀 알고 싶지 않은 가정불화나 과외나 납품 대금에 대한 사정을 시시콜콜 생각 없이 마냥 떠들기만 할까요? 휴대전화의 편리함을 통감하면서도 혼자 전화에 몰두하고 있는 광장의 현대인은 우리를 슬프게 합니다. “우리의 그리움을 위하여서는 이별이 있어야 하네”라고 시인은 노래합니다. 편지는 삶을 저만큼 거리를 두고 관조하는 사람이 그리움으로 쓰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이별 없는 세대가 순간순간 주고받는 메시지들만 허공에 노고지리처럼 동동 떠다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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