韓-佛 손잡고 ‘밀랍의 비밀’ 풀었다

  • 입력 2007년 3월 21일 03시 00분


《훼손 정도가 심각해 보존처리조차 불가능해 보였던 유엔교육과학문화기구(UNESCO·유네스코) 지정 세계기록문화유산 조선왕조실록(국보 151호) 밀랍본(蜜蠟本)의 보존에 청신호가 켜졌다.

국립문화재연구소는 “최근 실록 밀랍본의 성분과 제작 방법, 노화 메커니즘을 일부 규명하는 데 성공했다”며 “조만간 성분과 노화 과정이 최종 확인되면 실록 보존연구와 복원에 획기적 전기가 마련될 것”이라고 20일 밝혔다.

특히 한국과 프랑스의 문화재 보존처리 전문가들이 처음으로 머리를 맞댄 것도 이번 연구가 주목받는 이유다.

양국 정부는 1866년 병인양요 때 프랑스 군대가 약탈해 간 외규장각 도서 반환을 둘러싸고 외교적 마찰을 겪고 있다.》

실록 1229권 중 태조대부터 명종대까지 밀랍본 131권이 변색되고 얼룩이 생겼으며 종이에 밀랍이 들러붙어 균열이 생겼다는 지적이 제기된 시점은 2002년. 밀랍본은 밀랍이 발라진 한지로, 조선 초 종이 보존을 위해 밀랍을 발랐을 것으로 전문가들은 추정한다.

○ 한국-프랑스, 세계유산 복원 위해 손잡다

“실록에서 송진 향이 강하게 납니다. 분석이 끝나지 않았지만 밀랍을 빨리 말리기 위해 소량의 로진(rosin)이 포함됐을 가능성이 높습니다.”(조병묵 강원대 제지공학과 교수)

“냄새의 종류는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다만 로진이 포함됐다면 종이가 심하게 딱딱해져 완전히 바스라지지 않았을까요?”(베르트랑 라베드린 프랑스 고문서보존센터 소장)

13일 서울 종로구 국립고궁박물관은 양국 연구자들의 열띤 토론으로 후끈 달아올랐다. 이날 세미나에서 한국과 프랑스 연구자들은 그간의 연구 성과를 발표했다.

연구자들이 처음 만난 것은 2003년 5월. 당시 한국을 찾은 프랑스 연구자들은 문화재 보존처리에 사용되는 한국의 천연방부제 기술에 감탄하면서 공동연구를 제안했다.

당시 실록 밀랍본의 손상 원인을 찾지 못해 골머리를 앓던 국립문화재연구소는 종이 보존연구 분야에서 세계 최고를 자랑하는 프랑스의 제안을 거부할 이유가 없었다. 프랑스로서도 실록 밀랍본은 세계적으로 희귀한 종이 보존방식이어서 공동연구에 적극적이었다. 2005년 연구가 본격화됐다. 밀랍본 성분 분석은 프랑스 고문서보존센터가, 노화 실험은 국립문화재연구소가, 실록 상태 분석은 강원대 제지공학과 조병묵 교수팀이 맡았다.

○ 복원된 실록 볼 날 머지않았다

실록에 쓰인 밀랍은 동물성일까, 식물성일까, 아니면 광물성일까. 밀랍본은 어떤 메커니즘으로 손상됐으며 앞으로 얼마나 노화될 것인가.

양국 연구자들은 이 같은 의문을 풀기 위해 모조 밀랍본을 만들고 노화 시뮬레이션 실험과 성분 분석을 수없이 반복했다. 밀랍본과 똑같은 성분과 보관 환경을 찾는 것이 실험의 핵심. 손상 원인과 메커니즘을 규명해야 실록의 복원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마침내 양국 연구자들은 실록에 사용된 밀랍 성분이 동물성이라는 사실을 최종 확인했다. 또 제작 당시 한지를 밀랍에 담갔다가 꺼낸 뒤 한지에 밀랍을 균일하게 바르기 위해 도구를 사용했다고 추정할 수 있는 단서도 찾아냈다. 실록 밀랍본이 한지를 두세 겹 이어 붙여 밀도를 높인 이합지라는 사실도 밝혀냈다.

이규식 국립문화재연구소 보존과학연구실장은 “내년이면 밀랍 성분과 노화 메커니즘이 완전히 규명될 것이며 밀랍을 제거한 뒤 갈라진 종이 부분을 접합하고 실록 중 구멍이 난 부분을 메우는 것도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며 “복원된 실록을 볼 날도 머지않았다”고 말했다.

윤완준 기자 zeitu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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