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협화음과 전위적인 음향이 가득한 현대음악. 대부분의 사람들은 듣기도 전에 ‘나는 모르겠다’고 고개를 흔들게 마련이다. 그러나 우리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현대음악을 즐기고 빠져드는 순간이 있다. 바로 영화다.
상업적인 호러 영화 ‘스크림’에서 칼을 든 괴한이 화장실에서 희생자를 찾아 헤맬 때, 현실과 환상을 넘나들며 등을 오싹하게 만드는 심리 스릴러 영화에서, 우주에서 벌어지는 대 서사시를 그린 SF영화에 현대음악이 빠진다면 과연 어떨까? 이런 영화에 고전적인 테마송만 가득하다면 오히려 낯설다고 여길 관객들도 많을 것이다.
헤어 스타일부터 펑키해 보이는 베를린 필의 지휘자 사이먼 래틀 경은 영국에 있을 때부터 현대음악에 관심이 많았다. 그가 최근 베를린 필과 함께 녹음한 첫번째 영화음악 OST ‘향수’(EMI)를 냈다.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는 ‘세상에서 단 하나 뿐인 향수’를 만들어내기 위해 13명의 아름다운 여인들을 희생시킨 장밥티스트 그루누이가 주인공이다.
사이먼 경은 “소설 속의 그루누이가 말하듯이 만약 한 사람의 영혼이 그의 체취에 깃들여 있다면, 이 영화의 심장은 그 음악에 있다”고 말한다.
실제로 이 영화에서 음악이 차지하는 비중은 상당하다. 마치 향기의 무상함을 옮겨 놓으려는 듯 음악은 가볍게 날아가기도 하고, 주인공의 체취에 대한 광기와 집착을 환각적이고 강렬한 화음으로 표현해내기도 한다. 현대적인 사운드 중간중간에 등장하는 라트비아국립합창단의 소리는 성스럽고 거룩함의 극치를 보여 주기도 한다.
이처럼 영화에서 현대음악은 시각과 청각, 후각 등 복합적인 감각을 그려내기도 하고, 때로는 대사보다 더 강렬한 효과음으로 주인공의 심리상태를 표현해내기도 한다. ‘음악을 음향으로 이해’하는 현대음악가들은 악보에 표기된 음악적 소리와 일상의 소리를 구분하는 것이 더는 무의미하다고 말한다.
스탠리 큐브릭 감독은 영화 ‘2001 스페이스 오딧세이’(1968년)의 첫 장면에 죄르지 리게티의 ‘대기(atmosphere)’를 썼다. 리게티의 제자인 작곡가 진은숙 씨는 “큐브릭 감독은 리게티의 허락도 받지 않고 이곡을 썼다. 리게티의 현대음악이 자기가 생각했던 영화 이미지에 너무도 잘 어울렸기 때문이었다”고 말했다. 이 사건은 이후 법정소송으로 비화했지만 결과적으로 현대음악가 리게티를 세계적으로 알린 계기가 됐다.
일부에선 영화를 현대음악의 하나의 출구로 생각하기도 한다. 또한 현대무용가들의 공연장에서도 현대음악은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진다. 통신회사의 CF를 비롯해 TV에서도 전위적인 사운드의 음악은 쉴 새 없이 흘러나온다. 집에서 편하게 즐길 수 있는 음악은 아니지만, 이제는 현대음악에 대한 지독한 냉소와 편견을 거둘 때도 됐다. 현대미술처럼 현대음악도 이미 우리 생활주변 곳곳에서 살아 움직이고 있기 때문이다.
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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