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의 눈물로 얼룩진 ‘시인의 일기’

  • 입력 2007년 3월 30일 02시 59분


■ 고은 시인 문예지 연재 ‘바람의 기록’ 화제

‘6월 21일 저녁에 김화영이 나타났다. 그가 떠날 때 우리 집 마당 잔디밭에 돗자리를 깔고 술상을 차려 취한 바 있다. 이 까뮈가 돌아온 것이다.’

‘6월 22일 여기저기서 시민들의 집단행동이 깨지고 있다. 경찰 연행이 빈번하다.’

‘6월 23일 김병익에게 줄 병풍글씨 10폭과 1폭을 썼다. 무릎이 아팠다.’

월간 ‘문학사상’ 4월호에는 1974년 한여름의 기록이 실려 있다. 최인훈 이문구 김현 등 신화 같은 문인들이 어깨를 두르며 술 마시고, 시대를 한탄하며 눈물짓는 모습이 생생하다. 바로 고은(74·사진) 시인의 일기다. 올해 들어 연재를 시작한 시인의 ‘바람의 기록’. 그가 수십 년 써 온 일기를 다듬어 세상에 내보이는 것이다. 요즘 문단에선 연재물 중 단연 화제작으로 꼽는다.

시인이 보여 주는 1970년대는 정보과 형사가 수시로 찾아오던 엄혹한 시절이었지만 그만큼 찐득찐득한 우정으로 뭉쳤던 때이기도 했다. 일기에서 그는 동료 문인들과의 에피소드를 적나라하리만큼 낱낱이 적고 자신이 ‘망가지는’ 모습도 스스럼없이 내보인다. 민망함보다는, 시절에 대한 상처와 흥취가 앞선다.

‘구로동 가는 길이 어디요’라고 묻는 남루한 차림의 아이에게 돈 40원을 쥐여 주던 평론가 백낙청, 고은이 부르는 ‘타향살이’에 눈물을 흘리던 소설가 김승옥, 울면서 싸우다가도 이내 행복한 술판을 벌이던 평론가 김현, 원고지를 한 가득 안기면서 다 쓰면 더 갖다 주겠다던 시인 강은교….

28일 만난 시인은 “술 얘기밖에 없지요?”라며 웃었다. “황홀한 토론도 많이 했는데…. 그걸 다 적지 못해 안타깝네요.” 물론 취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던, 슬픔과 울분이 최고의 안주였던 시대였다.

‘김현 김주연 김용직 조해일이 왔다. 혼자 있으면 시가 찾아오고 벗들이 있으면 술이 찾아온다’ ‘이청준과 함께 우리 집으로 와서 또 마셨다. 청준 보내고 나는 뻗어 버렸다.’

“1960년대에 김구용 시인의 집을 들른 적이 있는데 그때 그의 일기를 보게 됐다. 그 전까진 기록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했는데, 생각이 달라졌다. 굼벵이가 지나가는 길도 역사라는 생각에 일기를 써야겠다고 결심했다.” 그가 보여 주는 ‘굼벵이의 역사’는 고단하다. ‘붓과 총의 충돌로 붓이 죽어버리는 시대’를 맞아 시인은 “올 테면 오너라, 네 총알에 쓰러질 내가 있다”고, 남산 쪽도 북악산 쪽도 쳐다보기 싫어 “모든 집들아 남과 북을 등져라”라고 외친다. 그의 말대로 “작가는 행복한 시대의 산물이 아니었다”.

이 원고에는 곡절이 많다. 대학노트며 금전출납부, 원고지를 가리지 않고 썼다. 가택수사 때 압수될까봐 일기를 집 밖 후미진 데 숨겨도 놓고, 친구 집에 맡겨도 놓았다. 일부는 잃어버리기도 했다. 그러다 보니 ‘의처증’이 생겨서 지금은 출판사에 꼭 사본을 보낸다고 한다.

끈끈했던 그때와 달리 지금 문단은 온기가 잘 와 닿지 않는다는 고은 시인. “내 시 ‘문의 마을에 가서’는 시인 신동문의 어머니가 돌아가셔서 장지에 따라갔다가 쓴 겁니다. 그때는 그렇게 시를 썼어요.” 아쉬워하면서도 그는 “지금은 지금의 방식이 있을 것”이라며 유연한 모습을 보였다. 대선을 앞두고 문인들의 정치 개입 문제가 불거져 나온 데 대해 시인은 “갈수록 말을 아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며 선을 긋기도 했다.

그는 지금도 일기를 쓰고 있다. 대취해서 정신이 없을 땐 다음 날 오전에 쓰더라도 거르는 일이 없다고 했다. 전날엔 무슨 일기를 썼느냐는 질문에 시인은 “신문에서 EU(유럽연합) 창설 50주년 기사를 보고 동아시아의 상황과 비교하면서 떠오른 생각을 적었다”고 명쾌하게 답했다.

김지영 기자 kimj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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