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캔팅해 주세요. 왜 있잖아요. ‘신의 물방울’ 1권에서 주인공이 하는 것처럼.”(손님)
“이 와인은 디캔팅을 하면 고유의 섬세한 맛이 깨질 수 있는데….”(소믈리에)
“무슨 소리예요. 신의 물방울도 안 봤어요? 디캔팅을 해야 향이 풍부해지고 맛이 좋아진다잖아요.”(손님)
#에피소드 둘
“이상해요. 여인이 다가오는 느낌이 들지 않아요.”(손님)
“그래요? 이 와인에서는 원래 그런 느낌을 찾기 어려운데요.”(소믈리에)
“아닌데. 신의 물방울에선 여인이 다가오는 느낌의 와인이라고 했는데….”(손님)》
와인 신드롬 일으킨 ‘신의 물방울’… 만화속 ‘진실’ 혹은 ‘오해’
서울 광화문 ‘가든 플레이스’의 총지배인 전현모 소믈리에는 요즘 곤혹스럽다. 2006년 한국 소믈리에 대회 우승자인 그의 설명도 통하지 않는다. 막무가내로 디캔팅을 요구한다. 디캔팅을 하면 맛이 깨지는 와인을 디캔팅한 뒤 “정말 환상적인 맛이야!”라며 감탄하는 손님을 보면 자신도 모르게 씁쓸해진다.
소믈리에 경력 2년차로 강남구 청담동 ‘와인&프렌즈’에서 일하는 이현정 씨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신의 물방울에서 나오는 장면과 똑같이 해 달라고 해요. 그들에게 이 만화책은 ‘와인 바이블’ 같아요.”
만화 ‘신의 물방울’ 신드롬이 한국의 와인계를 강타하면서 만화 속에 혼재된 허구(fiction)와 사실(fact)을 혼동해 생겨난 현상들이다.
1970년대 외화 시리즈 ‘600만불의 사나이’와 ‘소머즈’에 열광한 당시 아이들이 높은 옥상이나 계단에서 뛰어내리다 다친 것과 다르지 않다. 장르가 미국 드라마에서 일본 만화로, 소재가 사이보그에서 와인으로 바뀌었을 뿐이다.
2005년 11월 국내에서 1권이 발간된 이후 9권까지 70만 부 이상 팔린 신의 물방울은 와인에 대한 대중의 관심을 끌어올리는 역할을 했으나 여러 가지 부작용도 몰고 왔다.
본보는 6명의 와인 전문가와 함께 신의 물방울의 ‘허와 실’을 분석했다. 서현민(와인 전문가), 고형욱(와인 칼럼니스트), 전현모(소믈리에), 손용석(포브스코리아 와인담당 기자), 최정은(와인전문지 ‘와인 리뷰’ 기자), 임지현(와인 전문 마케터) 씨가 참여했다.
‘옥에 티’를 찾자는 게 아니라 와인 초보자나 애호가들에게 올바른 정보를 제공하기 위해서다.
○디캔팅은 꼭 필요한 경우에만
모든 와인을 디캔팅할 필요도 없다. 오히려 디캔팅을 해서 좋은 와인을 망칠 수 있다.
5만 원대 이하 와인 가운데 디캔팅을 해야 할 와인은 거의 없다. 애초 만들어질 때부터 따서 바로 마시도록 ‘설계’됐기 때문이다.
10만 원대 이상 와인 가운데 타닌이 많은 카베르네 쇼비뇽이나 네비올로 같은 품종으로 만든 와인, 특히 빈티지가 얼마 되지 않은 와인은 대부분 디캔팅해야 향이 풍부해지고 맛이 부드러워진다. 지역이나 양조장은 상관없다.
하지만 프랑스 부르고뉴에서 피노 누아 품종으로 만든 섬세한 와인은 자칫 디캔팅으로 고유의 맛을 잃을 수 있다.
빈티지로 볼 때 오래 묵은 와인은 대체로 디캔팅해 찌꺼기를 거른 후 바로 마시는 게 무난하다. 호주 그랜지 쉬라즈 같은 단단한 와인은 병에서 디캔터로 옮긴 뒤 다시 병으로 옮기는 ‘더블 디캔팅’이 좋다. 마시기 한두 시간 전에 병마개와 코르크를 따 열어두는 것도 방법이다.
○초보자들이 조심해야 할 함정
신의 물방울은 프랑스 와인, 특히 부르고뉴 와인에 대한 관심이 고조된 일본의 와인 시장을 반영한다.
부르고뉴 와인에 대한 작가의 찬사는 대단하다. 물론 이해는 간다. 부르고뉴 와인 ‘로마네 콩티(D.R.C) 에셰조 1985년산’을 접한 뒤 ‘신의 물방울’을 기획했으니까.
아무리 그래도 소개된 와인이 프랑스 부르고뉴와 보르도, 이탈리아에 쏠린 점은 지나치다. 독자들은 만화책에 등장하는 프랑스나 이탈리아 와인만이 최고라고 착각할 수 있다.
이미 맹목적인 반응이 나타나고 있다. 만화에 소개된 와인들은 품귀현상이 생겼다.
와인에 입문하는 초보자들은 와인의 전통 강호로 불리는 스페인 독일은 물론 최근 뜨는 칠레, 호주, 미국(캘리포니아) 와인의 존재도 알아야 한다.
9권까지 만화에 등장하는 와인의 93.2%가 10만 원 이상 고가이며 한국에서는 구하기 힘들다는 점도 문제다. 1권부터 9권까지 등장하는 117개 와인 가운데 한국에서 5만 원 이하에 구할 수 있는 와인은 ‘오메독 드 지스쿠르 2000년’(4만5000원) 뿐이다.
일본에서 2000엔대에 팔린다고 소개된 ‘샤토 몽페라’는 최근 빈티지도 한국에서 6만 원대에 팔린다.
너무 비싼 값에 놀란 와인 초보자들이 ‘와인은 일부 부유층의 사치품’으로 오해할 수 있다. 작품의 소재를 고르는 것은 작가의 자유지만 독자가 자신의 작품으로 피해를 보지 않도록 하는 것은 작가의 의무이다.
만화책에 등장하는 고급 와인은 대부분 한국 독자들에게는 ‘그림의 떡’인 셈이다.
○향과 맛도 만화와 다른 경우 많아
1권에서 주인공은 ‘샤토 몽페라 2001년’이 미국 캘리포니아가 낳은 명품 와인 ‘오퍼스 원 2000년’보다 뛰어나다고 말한다. 그러나 실제로 두 와인을 마셔본 사람은 쉽게 동의하지 않는다.
만화에서 주인공의 라이벌인 와인 평론가 ‘토미네 잇세’는 ‘무통 로칠드 1982년’을 음미하면서 장 프랑수아 밀레의 그림 ‘만종’을 떠올렸다.
무통 로칠드 1982년은 정적 분위기인 밀레의 만종과 어울리지 않는다. 이 와인은 1982년산 모든 와인 가운데 라투르와 함께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강력한 타닌을 지닌 남성 와인으로 평가된다. 아무리 만화라는 점을 인정해도 여성적인 만종은 아니다. ‘잔다르크’나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이라면 몰라도.
○로버트 파커의 평가에 의존
작가는 만화에 등장하는 다양한 에피소드를 통해 “와인 전문가들의 평점이 아닌 자신의 입맛을 따르라”고 강조한다.
하지만 이 만화 역시 미국의 와인평론가 로버트 파커에게 너무 의존하고 있다. 작가가 명품 와인(2사도)으로 꼽은 프랑스 마르고 지역의 ‘샤토 팔메 1999년산’은 파커가 95점을 준 와인이다. 파커가 마르고 지역 1999년산 와인에 준 점수 가운데 최고점이다.
이 와인을 마셔본 다른 전문가들에게는 그렇게 인상적인 와인이 아니다. 미국 와인 전문지 ‘와인 스펙테이터’가 매긴 점수도 마찬가지다.
만화에서 주인공과 겨루는 ‘토미네 잇세’가 최악의 와인으로 꼽은 마르고 1970년산은 파커가 겨우 67점을 준 와인. 지난해 방한한 마르고 여주인 코린 망첼로풀로 씨는 “1968∼71년, 73년도는 우리뿐 아니라 보르도 전체적으로 포도 작황이 안 좋았다. 무슨 근거로 ‘최악의 와인’으로 소개했는지 모르겠다”고 반박했다.
파커는 세계 최고의 와인 평론가다. 그가 감기에 걸려 보르도 방문 일정이 1주일 미뤄지자 보르도 와인 출시도 1주일 연기됐을 정도다. 그만큼 부작용도 크다. 세상의 모든 와인 애호가가 오크향을 좋아하는 파커의 입맛을 따라가야 하는 것은 아니다. ‘신의 물방울’ 작가도 파커의 함정에 빠졌다.
○시음은 순서에 따라
2권에 나오는 이탈리아 와인 애호가 ‘혼마 초스케’는 잔에 담긴 와인의 향을 맡고 이탈리아 와인이 아니면 모두 쏟아버린다. 후각 능력을 극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하지만 한 모금도 마시지 않고 향만으로 와인을 판단하는 것은 금물이다. 와인은 어디까지나 눈(색)→코(향)→혀(맛)→입(구조)→목(보디) 등 순서에 따라 느껴야 한다. 만화적 상상력이 가미된 시음 방법이 정석처럼 받아들여지면 곤란하다.
아무리 어릴 때 영재교육을 받았어도 와인에 대한 지식이 없는 주인공이 한 번도 마셔보지 못한 와인의 맛을 알아맞힌다는 것도 비현실적이다. 주인공이 천재적 감각을 갖고 있음을 과장해서 표현한 만화적 설정일 뿐이다. 따라서 무슨 향인지, 어떤 맛인지 당장 몰라도 부끄러워할 이유가 없다.
이호갑 기자 gdt@donga.com
‘신의 물방울’ 제대로 즐기는 6가지 포인트
‘신의 물방울’을 분석한 와인 전문가 6명의 공통된 견해다. 와인 애호가뿐 아니라 이제까지 와인을 마시지 않던 사람들을 와인의 포로로 만들면서 재미있고 쉽게 와인 지식에 대한 갈증을 풀어준 점을 인정한 것이다.
‘신의 물방울’은 최근 10권이 출간됐다. 앞으로도 몇 년간 30권 정도가 더 나올 예정이다. 계속해서 만화 속에서 수백 개의 와인을 접하게 된다는 얘기다.
그렇다면 이 만화책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신의 물방울’을 제대로 이해하고 즐기는 가이드북을 집필 중인 와인 칼럼니스트 유효상 씨는 6가지를 조언했다.
①무작정 따라하기
만화책에 나오는 와인을 마셔보고 작가의 예술적 표현과 나의 느낌을 비교한다. 상당한 노력과 돈이 들어가 현실적으로 쉽지 않지만 ‘평생 목표’로 삼을 만하다. 우선 작가가 아끼는 프랑스의 부르고뉴 와인 가운데 10만 원 이하부터 도전한다. ‘루이 라투르 샤블리’, ‘루이 라투르 알록스 코르통’, ‘페블레 뉘 생 조르주’ 등.
②신의 물방울과 12사도 경험하기
이 둘을 합친 13가지를 마시는 긴 여정을 거치면서 와인에 대한 지식과 경험이 풍부한 작가의 취향을 공유해본다. 하지만 10권까지 공개된 3개의 사도 중 1, 2사도는 품절이고 3사도는 국내에서 구하기 힘들다는 문제가 있다.
③일명 ‘짝퉁’ 찾기
만화에 등장한 와인과 같은 지역에서 같은 품종으로 재배된 저렴한 와인을 찾아 시음하면서 간접 체험한다. 수백만 원을 호가하는 샤토 무통 로칠드 1982년은 ‘포이약 바롱 나타니엘’로 대신한다. 이 두 와인은 바롱 필리프 드 로칠드사가 소유한 포도밭에서 생산된다. 또 특급 와인 ‘샤토 오브리옹’은 앙드레 뤼통이 생산하는 ‘샤토 라 루비에르’로 그 특성을 느낄 수 있다.
④나만의 ‘신의 물방울’ 찾기
그동안 마신 와인을 포함해 자신의 느낌만으로 12사도와 ‘신의 물방울’을 정한다. 와인은 음식처럼 모든 사람에게 똑같은 평가를 받기 힘들다. 자신의 개성대로 정한다.
⑤만화 속 인물 되기
주인공 시즈쿠와 라이벌 잇세, 초스케 등 만화에 등장하는 캐릭터 가운데 선호하는 인물을 정해 그들이 좋아하는 와인을 마신다. 와인을 마시는 즐거움이 커진다.
⑥부록 즐기기
만화의 부록에 실린 수많은 정보와 지식을 자신의 것으로 만든다.
이호갑 기자 gd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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