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티븐 소더버그 감독에게 아카데미 감독상을 안겨준 영화 ‘트래픽’(2000년)과 니컬러스 케이지가 주연한 영화 ‘로드 오브 워’(2005년), 그리고 9·11테러(2001년)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범죄의 경제학’을 다루고 있는 이 책에서 다루는 내용이라는 점이다. 이 책에서는 핏빛 가득한 마약과의 전쟁과 미국 중상층의 일상이 직접 연결돼 있음을 보여준 ‘트래픽’과 ‘죽음의 상인’으로 불리는 국제적 무기밀매상이 바로 우리 이웃의 소심한 가장일 수 있음을 보여 준 ‘로드 오브 워’의 불편한 진실이 더욱 확대된다.
국제 관계 전문지 ‘포린 폴리시’의 편집장인 저자는 마약밀매, 무기밀매, 인신매매와 같은 전통적 범죄산업은 물론 ‘짝퉁’ 산업과 해적판 산업을 포함한 ‘검은 경제’가 엄청난 활황을 누리며 우리 일상 곳곳에 침투하고 있음을 고발한다.
아일랜드공화국군(IRA)과 ‘바스크 조국과 자유(ETA)’ 같은 테러단체는 손가방과 옷을 비롯해 향수와 DVD에 이르기까지 모든 종류의 위조품 거래를 통해 자금을 마련한다. 이 중에는 애니메이션 ‘라이언 킹’의 해적판도 들어 있다. 1993년 미수에 그쳤던 세계무역센터 폭파사건의 범인들은 브로드웨이 가판대에서 짝퉁 티셔츠를 판 돈을 활동자금으로 썼다. 알바니아에선 아동 포르노물을 위해 배 속의 아기들이 5000유로(약 625만 원)에 입도선매된다. 중국의 한 교도소에서는 다음 날 처형될 사형수의 간이 산 채로 추출될 만큼 정부 관료가 개입한 장기밀매가 성행하고 있다.
이들 범죄산업을 통해 형성된 검은돈 세탁 시장의 규모가 전 세계 국내총생산(GDP)의 10%를 차지할 만큼 활황이다. 110개국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 따르면 돈세탁을 포함한 지하경제의 규모가 32.6%에 이르는 것으로 조사됐다.
저자는 이런 암시장이 지금처럼 활황을 누리는 이유가 1990년대 이후 냉전의 종식과 시장의 자유화가 가져온 결과라고 지적한다. 냉전 종식으로 미국이나 소련의 지원이 끊겨서 국가 기능을 할 수 없게 된 ‘실패 국가’들이 이 범죄 산업을 속속 유치하고 있기 때문이다. 마약과 무기의 중간 기착지가 된 몰도바, 무기밀매를 특화하면서 몰도바에서 떨어져 나온 트랜스드니에스터, 2003년 압류된 마약의 금액이 연간 GDP의 절반을 차지하는 카자흐스탄, 무기 마약 위조화폐가 국가 경제의 공식적 주요 수입원이 된 북한과 같은 나라가 지구상에 넘쳐난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유능한 정부를 자랑했던 다른 모범국가들도 시장자유화 조치로 국경과 시장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하면서 효율과 경쟁의 논리에 가장 충실한 검은 산업에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다. 게다가 시장논리로 무장한 ‘작은 정부론’은 바로 이런 범죄산업을 때려잡아야 할 정부 부서의 축소를 초래한다. 문제는 이들 범죄산업이 암시장에만 머물지 않고 뇌물과 매수를 통해 기업과 관료조직, 언론까지 집어삼킨다는 점이다. 시장자유화가 가장 반시장적인 암시장의 확산을 가져오는 현상에 대해 이제 시장자유화를 그처럼 옹호해 왔던 경제학자들이 답할 차례다. 원제 ‘Illicit’(2005년).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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