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로 구술잡기]‘꽃으로 피기보다 새가 되어 날아가리’

  • 입력 2007년 4월 7일 02시 59분


◇꽃으로 피기보다 새가 되어 날아가리/정창권 지음/243쪽·1만1000원·푸른숲

구술은 즉흥 연주다. 질문에 대답할 사고의 조각들을 순발력 있게 엮어내야 한다. 하지만 생각이란 참 종잡을 수가 없다. 때로는 도화선처럼 가늘게 타 들어가다가도, 때로는 돌풍처럼 왔다가 금세 사라진다.

떠오른 첫 생각에 말랑한 살을 붙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학생들은 대부분 추상적 개념어를 맴돌며 난감해한다. 구체적 상황 속에 직접 들어가 찬찬히 따져 보면 큰 맥락을 짚는 데 도움이 된다.

이 책은 제주도에 전해 오는 ‘만덕 할망’에 관한 이야기이다. 실존 인물 김만덕은 천한 관기 출신이며, 여성이었고, 제주도 사람이었다. 조선 후기답게 신분 차별, 성 차별, 지역 차별의 굴레가 겹겹이었으니, 그에 관한 기록이 많을 리 없다.

그러나 이 책은 살아 움직이는 ‘역사 스페셜 김만덕 편’으로 손색이 없다. 거상(巨商)의 반열에까지 올랐으나, 여성이기에 곧 잊혀져 버린 인물이다. 저자는 조그만 단서도 놓치지 않고 추적하여 김만덕의 인생과 18세기 제주민들의 생활을 드라마로 엮었다. 논리적 추론이 활기 넘치는 상상력의 바탕임을 새삼 확인한다.

우선 이 책은 마치 국사책을 영화로 보는 듯한 착각을 준다. 수업시간에 외웠던 ‘포구 중심의 경제, 객주, 여각, 금난전권, 선대제 수공업’ 등 교과서 속 용어가 사람들의 인생살이와 얽혀 함께 돌아간다. 제주도 내의 상권 다툼, 내륙과 제주도의 상거래, 기지개를 켜는 수공업의 발전상이 활자를 벗고 튀어나오는 느낌이다.

세밀화에 비할까. 이 책은 제주민들의 사소한 일상도 꼼꼼히 되살린다. ‘이어도가’를 부르는 내력, 독특한 결혼식과 이사 풍습, 해녀들의 물질, 밭머리에 묘지를 두는 일 등 외부인들은 잘 알지 못하는 사연들을 아기자기 보여 준다. 생활의 이해는 교감을 만드는 풀칠이다.

입체적인 자료 활용도 돋보인다. 조선시대에 여상인이 흔했을까. 여성 소금장수와 생선장수 일행을 그린 김홍도의 ‘매염파행’이 한마디로 답해 준다. 또한 당시 제주목 성읍 건축과 포구를 보여 주는 옛 지도, 감귤 진상을 준비하는 그림 등도 종합적 이해를 돕는 길잡이들이다.

무엇보다 만덕의 생애는 우리에게 ‘부자의 철학’을 질문한다. 그는 기근이 들자 사재로 양곡을 사들여 제주민의 생명을 구했다. ‘큰 부자의 진정한 기부’는 사람들의 가슴에 울림을 낳는다. 제주민의 존경이 담긴 이름, ‘만덕 할망’이 전해 오는 까닭이다.

즐겁게 읽은 뒤 친구들과 이런 점을 토론해 보자. 만덕의 경영법에 깃든 철학은 무엇일까, 화폐에 넣을 여성 인물로 김만덕은 어떨까, ‘꽃으로 피기보다 새가 되어 날아가리’라는 제목은 무슨 뜻일까. 저자 덕분에 김만덕이 살아났듯, 토론은 내 사유의 힘을 살릴 것이다.

권희정 상명대부속여고 철학·논술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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