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희경(48) 씨는 한 걸음 더 앞으로 갔다. 신작 ‘아름다움이 나를 멸시한다’. 작가 스스로 “오디션을 통과한 기분”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던 ‘상속’ 이후 5년 만의 소설집이다.
6편의 중단편이 묶인 이 책은 그의 독자들에게 종합선물세트를 받는 기분을 안겨준다. 톡 쏘는 은희경표 소설, 삶의 무게가 스민 작품, ‘은희경스럽지 않은’ 판타지 소설…. 여기에다 성우들이 낭독한 오디오북까지 곁들여졌다.
‘일관성 없어 보이는’ 소설집은 은 씨답지 않다. 냉소면 냉소, 진중이면 진중. 그는 말하자면, 문체도 주제도 딱 맞아떨어져야 하는 스타일이었다. 그런데 ‘아름다움이…’는, 작가 표현을 빌리자면, “어수룩해 보인다”고 한다. 작품이 그렇다는 게 아니다. ‘명품소설’을 추구했던 완벽주의 작가가 소박하고 편안한 글쓰기로 접어들었다는 얘기다.
작가가 가장 애정이 가는 작품으로 꼽는 ‘유리 가가린의 푸른 별’. ‘인생에 변수가 거의 없는 나이가 돼 버린’ 출판사 사장이, 오래전 분실했던 친구 J의 소설 원고와 ‘은숙’이라는 여성에게서 온 e메일을 맞닥뜨리고는 묻어놓았던 청춘을 떠올린다는 내용이다. 순수했던 젊은 날은 우주비행사 유리 가가린이 날아다녔던 우주만큼이나 아득하게 느껴진다. 순정을 잃어버린 나이든 사내의 회한이 짙게 밴 문장들에서, 인생의 의미를 진지하게 탐색하는 작가의 변화가 느껴진다.
수시로 몽상에 빠지지만 현실은 늘 상상과 다른 소녀 B의 이야기 ‘날씨와 생활’에선 은희경표 아이러니의 매력이 여전하다. 만년 고시생 주인공이 꿈같은 공간에서 몸이 여러 개로 갈라지는 난쟁이 여자를 만나는 ‘고독의 발견’이나, 도플갱어(분신)가 나오는 ‘의심을 찬양함’은 은 씨 작품에선 만날 수 없었던 판타지적 설정이 등장해 새롭고도 재미있다.
다소 울퉁불퉁한 이 작품집을 세상에 내보내는 은 씨는 어떤 마음일까?
“2004년 미국에서 돌아왔을 때 달라진 환경에 좀처럼 작품을 쓰지 못했다. 그러다가 ‘안 쓰니까 불행한 것’이라는 생각에, 어떻게든 써야겠다고 결심했다. 소설이 잡스러운 건데, 남루한 모습도 보여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완벽한 문학을 만들기보다 솔직한 문학적 여정을 만들어가야겠다는 생각도.” 어쩌면 그간의 ‘은희경 소설’을 기대했던 독자들은 낯설어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책은 전보다 더 많은 공감을 얻을 것 같다. ‘인간적인’ 작품들이어서다.
김지영 기자 kimj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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