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회에서 영어실력이 계급을 결정한다는 말이 사실일까. 과거 영국과 미국의 식민지였던 말레이시아와 필리핀에선 공용어로서 영어를 퇴출시키는 판에 일본의 식민지였던 한국에서 영어공용어론이 나오는 이유는 무엇일까. 읽기와 쓰기 중심보다 듣기와 말하기 중심의 영어교육이 더 절실하다는 믿음이 맞는 것일까.
어학연수와 조기교육으로도 모자라 어린이들의 멀쩡한 혀뿌리까지 찢어가며 영어를 잘하고자 기를 쓰는 나라에서 이런 질문은 참 불편하다. 14명의 영어학자 언어학자 사회학자가 글로 참여한 이 책은 이런 불편한 진실과의 대면을 통해 학습대상으로서가 아니라 사회분석의 대상으로 영어를 바라본다.
이들에 따르면 한국에서 영어는 피에르 부르디외가 말한 ‘문화자본’의 전형이다. 소득, 생활수준, 부모의 학력과 영어의 상관관계가 뚜렷함을 보여 주는 대학생 1719명에 대한 설문조사 결과가 이를 뒷받침한다. 영어는 이제 실력이 아닌 계급이다.
영어교육에 대한 한국사회의 강박증은 여기서 출발한다. 하지만 한자가 중화질서의 내면화를 낳았듯 영어는 미국 중심 세계질서의 내면화를 가져온다.
어차피 영어가 모국어가 아닌 사람에게 ‘영어 정복’은 불가능하다. 그럼에도 그 불가능에 끊임없이 도전하게 만들고 그도 모자라 자발적으로 영어공용화론까지 들고 나오게 하는 것이야말로 지독한 열등감의 산물이다. ‘의미’보다 ‘소리’에 치중하는 현재 영어교육의 기형성도 그 중독증세의 하나다.
이는 일제의 식민지상황에 갇힌 일부 조선인들이 스스로의 잠재력을 보지 못하고 “엽전은 역시 안 돼”라는 패배감에 젖었던 모습과도 닮았다.
하지만 당시에도 모국어를 지키려는 눈물겨운 투쟁은 계속됐다. 그런 의미에서 자신의 언어로부터 유배를 자처하는 영어공용어론만큼 무서운 식민주의는 없다고 저자들은 강조한다.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