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갈피 속의 오늘]1923년 ‘월하의 맹서’ 시사회

  • 입력 2007년 4월 9일 03시 04분


“활동사진을 볼 때도 연초가 필요. 연초를 무료로 받고 활동사진을 보려면 2등석 1매에 화접 1개, 폐비 1개 증정. 3등석 1매에 화접 1개, 코스모스 1개 증정.”(부산일보, 1917년 4월 3일자)

한국에서 영화가 상영되기 시작한 초기. 무성영화(활동사진) 상영은 담배회사의 판촉 행사로 인기를 끌었다. 대부분의 상영관은 목조였고 화재도 빈번했지만 활동사진관에서는 관객의 흡연을 금지하지 않았고, 극장 내 매점에서도 담배를 팔았다.

당시 상영된 영화는 ‘대열차강도’(1903년) ‘쿼바디스’(1911년) ‘폼페이 최후의 날’(1913년) ‘나폴레옹 일대기’(1914년) 등 해외 무성영화였다.

안종화의 ‘한국영화 측면비사’는 당시 처음 영화를 접했던 이들의 놀라움을 전한다.

“불이 꺼진다. 이어 화차가 달려 나온다. 관중석은 수라장이 된다. 혹시 화차와 충돌할까봐 관객들이 이리 피하고 저리 피하고 아우성치기 때문이다. 영화가 끝난 다음은 더욱 가관이다. 관중들이 무대로 몰려들어 스크린을 들춰보느라고 일대 혼잡을 이뤘다. 조금 전에 본 화차의 출처가 의심스러웠던 것이다.”

한국인이 만든 최초의 영화는 1919년 10월 27일 단성사에서 개봉된 ‘의리적 구투’다. 그러나 이 작품은 연극과 영화를 번갈아 보여 주는 ‘연쇄극(키노 드라마)’이었다. 연극을 하다가 액션 장면에서는 한강철교, 장충단, 노량진에서 미리 촬영한 필름을 상영해 주는 식이었다.

한국 최초의 극영화는 1923년에 4월 9일 첫 시사회를 가진 윤백남 감독의 ‘월하의 맹서’이다. 조선총독부 체신청에서 지원한 저축장려영화였다. 이 영화에는 최초의 여배우인 이월하(1905∼1928)가 출연해 스타덤에 올랐다. 이월하는 이후 ‘해의 비곡’ ‘뿔 빠진 황소’ ‘기나가의 비밀’ 등에 출연했으나 말년은 비참했다. 조선 권번의 기생이 됐다가 일본으로 간 뒤 그곳에서 음독자살한 것으로 알려졌다.

초기 영화는 총독부와 일본 자본, 촬영 기술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그러나 이후 조선인의 자본과 기술, 연기로 제작된 영화가 쏟아졌다. ‘장화홍련전’ ‘아리랑’ 등 일제강점기 한국인이 만든 영화는 100편이 좀 넘는다. 이들 영화는 당시 조선의 민족의식과 생활상을 고스란히 담고 있지만 제대로 보존된 게 거의 없다.

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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