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화영 교수의 그림 읽기]일상 속의 소외감

  • 입력 2007년 4월 14일 02시 5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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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마분지’ 그림=제롬 륄리에, 큰나 펴냄
‘작은 마분지’ 그림=제롬 륄리에, 큰나 펴냄
아파트 단지와 지하철 역 사이의 언덕바지 길을 연두색 마을버스가 하루 종일 지루한 줄도 모르고 오갑니다. 출퇴근 시간을 제외하면 이 버스 안은 대개 한산한 편입니다. 그런데 언제나 시끌벅적한 버스 안의 소음이 그 한가함을 온통 들쑤셔 놓습니다. 손에 들고 있던 책을 펼쳐 읽으려 해 보지만 최대한 높은 볼륨으로 틀어 놓은 라디오 소리에 책의 활자들이 점점 흐려집니다. 인기 코미디언들이 둘러앉아 시시덕거리거나 성우들이 지나간 시절의 정치인 목소리를 흉내 냅니다. 그런 소음 속에서도 다른 승객들은 전혀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을 짓고 있습니다. 독서를 방해받아 섭섭한 마음보다 더욱 견디기 힘든 것은 차 안에서 감히 독서를 하려 드는 소수자 특유의 소외감입니다.

지하철 전동차에 오르노라면 다른 어느 나라 지하철에서도 들어 보지 못한, 그러나 서울에서는 신물이 나도록 매번 반복되는 경고의 목소리를 듣게 됩니다. “우리 역은 전동차와 승강장 사이가 넓어서 발이 빠질 위험이 있으니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파리나 도쿄 지하철보다 나중에 신설한 지하철을 이렇게 설계해 놓은 독창성 못지않게 그 위험의 원인을 근원적으로 제거할 생각은 하지 않고 한없이 경고방송만 되풀이하는 것은 실로 진풍경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래도 다른 승객들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표정을 짓고 있습니다. 매번 경고방송을 잊지 않는 지하철 당국에 깊은 감사라도 드린다는 듯한 그 얼굴들 가운데서 나는 만만찮은 소외감을 느낍니다.

지하철의 출입문 위에 붙은 노선도는 왜소하고 역 이름을 표시한 글자는 너무나 작아서 좌석에 앉은 채로는 읽을 수 없고 앞에 바싹 다가서도 시원스럽게 보이지 않습니다. 바로 옆의 상당 공간을 광고에 뺏긴 탓입니다. 차가 역에 도착해도 도쿄나 파리처럼 창밖으로 역 이름 표시가 크고 정확하게 보이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도처에 붙어 있는 각종 광고는 고함치듯 잘 보이는데 말입니다. 그런데도 다른 승객들은 마치 노선과 역 이름을 잘 모르면서 지하철은 왜 탔느냐고 나무라는 듯 태연하고 대범한 표정들입니다. 일상 속에서 자꾸만 되살아나는 나의 이런 종류의 소외감은 민족 통일 같은 국가 대사들을 제쳐 놓고 사소한 일들에나 집착하는 나의 소심함에서 오는 것이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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