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은 물질적 만족을 위해서가 아니라 타인에게 행복을 주기 위한 것이고 자본은 민주주의를 위해 통제되며 불평등은 해소되고 박애의 정신이 살아 숨쉬는 사회.
미래학자 자크 아탈리가 진단한 장밋빛 미래다. 이른바 하이퍼(hyper) 민주주의의 시대, 그러나 거기에 이르는 과정은 간단치 않다. 거대 제국 미국을 대신할 하이퍼 제국의 등장, 이로 인한 하이퍼 분쟁을 거쳐야 얻을 수 있는 열매다. 하이퍼 3단계 설이다.
프랑스의 지성으로 손꼽히는 아탈리는 자본주의에서의 금융의 불안정성, 테러리즘의 위협, 태평양 시대의 부상을 예언하며 세계 지성계에 족적을 남긴 학자. 인류사를 정착사가 아닌 유목민의 역사로 해석하는 그는 이번에도 독특한 메스로 인류사를 해부하며 미래 예언을 뒷받침하고 있다.
기존 역사서들이 왕이나 제국의 흥망성쇠를 선호한 반면 저자는 세계 경제사에서 핵심 역할을 했던 9개의 ‘거점’ 도시(브루게 베네치아 앤트워프 제노바 암스테르담 런던 보스턴 뉴욕 캘리포니아)의 흥망사를 통해 인류의 역사를 반추한다.
9개의 거점 도시는 작지만 내부에 폭발적인 에너지와 자유롭게 살고자 하는 욕망을 간직한 공간이었다. 자유와 경제적 풍요가 보장된 이들 도시에는 예술가 학자 법률가 장인 등이 모여들고 군사 경제 문화의 도시로 성장해 세계의 중심지가 됐다.
‘거점’으로 성장하려면 배후에 농업생산이 가능한 광활한 농토와 거대 항구, 축적된 자본이 필요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요건은 도시의 정신이었다고 아탈리는 말한다.
첫째, 부족함을 느끼는 정신이다. 저자는 결핍에 대한 인식이야말로 새로운 부를 찾아 나서게 만드는 원동력이며 부족함을 메우는 과정에서 역사는 진보한다고 강조한다. 지속적으로 해변의 모래를 퍼내지 않으면 항구 기능이 어려웠던 브루게(벨기에 서북부의 도시)가 세계적 항구로 발전한 것이나 ‘거점’의 후보였던 중국의 항구들이 풍족한 식량 때문에 교역을 외면하며 기회를 놓쳤던 것이 좋은 예다.
둘째, 신기술을 실제 사용할 수 있는 문화 정치적 분위기를 조성하는 일이다. 런던을 세계적 ‘거점’으로 성장시킨 증기기관은 프랑스가 원조였고 베네치아를 지중해 경제의 중심으로 만든 회계 보험 제도는 제노바와 피렌체로부터 가져온 것이었다.
셋째, 외부의 엘리트를 받아들이는 개방 정신이다.
막대한 대서양 무역으로 쉽게 거점이 될 수 있었던 스페인과 프랑스의 도시들이 주저앉았던 이유는 외부에서 온 유대인과 신교도들을 쫓아내 인력풀을 넓히지 못한 데 있었다. 네덜란드에서 활약한 철학자 스피노자의 선조는 스페인에서 쫓겨난 유대인이었고 17, 18세기 영국과 네덜란드의 중흥을 이끈 자본가들은 프랑스에서 쫓겨난 신교도들이었다.
그러나 ‘거점’은 영원할 수 없다. 시대의 변천에 따라 ‘거점’의 산업은 수익성이 떨어지고 거점 유지를 위한 자본 부족에 시달리며 사회 불평등이 가속화된다. 여기에 평화 유지와 외부의 적을 방어하기 위해 지나치게 많은 비용이 지출될 때 ‘거점’은 여지없이 쇠락했다. 그런 측면에서 저자는 현재의 ‘거점’ 도시 로스앤젤레스를 갖고 있는 미국은 이라크전쟁을 비롯한 대테러전쟁 비용으로 머지않아 세계의 패자에서 내려올 단계에 이르렀다고 지적한다.
이후 등장할 것은 하이퍼 제국 시대. 급속히 발달한 인터넷 가상공간과 시장경제를 바탕으로 국가의 개념이 무너지고 민간기업이 국방 치안 통화 등 공공 제도와 서비스를 대체하는 시대다. 극단적인 자본 이익 추구의 하이퍼 제국 시대는 결국 양극화, 인종과 종교의 극단적인 대립을 낳으며 하이퍼 분쟁기로 이어진다.
저자는 하이퍼 분쟁기를 인류의 존망이 달린 시기로 전망한다. 이 시기를 극복하면 그동안의 문제점에 대한 비판의식과 함께 공공성 민주주의 사회통합 등을 내건 하이퍼 민주주의 시대로 넘어간다는 것이다.
흥미로운 부분은 한국에 대한 전망이다. 저자는 한국을 중국 인도 브라질 등과 함께 미래를 이끌어 갈 ‘일레븐’의 하나로 평가한 뒤 2025년경 한국의 국내총생산(GDP)이 세계 2위로 성장할 것이라는 낙관적 전망을 내놓는다. 민주주의 정보기술(IT) 등 미래 산업의 발전이 그 근거다. 양극화 해소와 북한 문제의 평화적 해결이 선결 과제로 남는다고 지적했다. 원제 ‘Une br`eve histoire de l'avenir’(2006년).
유성운 기자 polari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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