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많은 인생 선배에겐 정말 죄송한데, 요새 본 영화들에서 계속 한 단어를 지겹게 떠올렸다. 바로 ‘인생무상(人生無常)’.
‘굿 셰퍼드’(19일 개봉)에서 CIA 요원인 에드워드(맷 데이먼)는 평생을 조국에 헌신하며 첩보원으로 살아가지만 그것 때문에 결국은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아들에게 못할 짓을 한다. 그래서 뭐가 남았을까. 뻔하다. 제목(The Good Shepherd)은 ‘선한 목자’로 번역되지만 보고 나면 아무래도 ‘충실한 경비견(셰퍼드)’을 의미하는 것 같다. 그는 국가의 ‘충견’이었다. 감독이자 장군 역으로 출연도 하는 로버트 드니로가 말한다 “누가 뭐라든 아무도 믿지 말게. 결국 우린 도구일 뿐이야.” 국가나 회사는 감정이 없다. 아무리 충성을 바치고 사랑해도 그만큼 당신을 사랑해 주진 않는다. 아, 인생무상.
그래도 ‘스위트 홈’이 있으니 괜찮을까. ‘우아한 세계’의 인구(송강호)는 깡패질 하며 처자식 먹여 살리지만 딸내미는 아빠가 죽었으면 좋겠단다. 가족을 캐나다로 떠나보내고 ‘기러기 아빠’가 된 그는 혼자 비빔면을 먹다가 펑펑 울며 그릇을 집어 던진다. 그러고는 걸레를 가져와 바닥을 닦는다. 이 시대 40대 가장의 모습. 월급의 반을 사교육비로 쏟아가며 가르쳐 봤자 다 소용없다. 아, 인생무상.
‘천년학’에 이르면 차라리 울고 싶다. 가장 아름다운 장면으로 꼽히는 백사 노인의 죽음. 매화 꽃잎이 눈송이처럼 흩날리는데 노인의 첩이었던 송화가 그를 떠나보내며 구슬프게 노래한다. “꿈이로다 꿈이로다 모두가 다 꿈이로다… 꿈 깨니 또 꿈이요 깨인 꿈도 꿈이로다 꿈에 나서 꿈에 살고 꿈에 죽어 가는 인생 부질없다….” 친일파로 떵떵거리며 산 노인에게도 가난한 소리꾼에게도 삶은 하룻밤 꿈이었다. 피 한 방울 안 섞였지만 오누이로 자란 동호와 송화의 안타까운 사랑은 그래서 더 답답하다. 어차피 꿈같은 인생인데 그냥 화끈하게 저지르지. 아, 인생무상.
도저히 헤어 나오지 못할 허무함에 빠져들게 만든 건 ‘선샤인’(19일 개봉)이다. ‘트레인스포팅’의 대니 보일이 만든 이 SF 스릴러는 태양이 죽어가는 상황에서 핵폭발로 태양을 살리러 나간 8명의 우주인이 사고로 하나씩 죽어 나가는 얘기다. 이걸 보고 알았다. ‘우주 공간에서 인간의 존재’가 얼마나 무의미한지. 우주선 밖은 영하 273도. 우주에 떨어진 몸은 그 순간 얼어 작은 충격에도 흙이 되어 부서진다. 부서진 몸속의 피는 얼어서 가루가 되어 떨어진다. 영화 대사처럼 ‘흙에서 흙으로(dust to dust)’다. 물론 온도가 아니라도 기압 차 때문에 몸이 터져버리겠지만. 표면온도 5500도의 태양 앞에서 모든 생물체는 몇 초 안에 흔적도 없이 소멸해 버린다. 영화에서 미니어처와 CG로 만든 태양의 모습은 극단의 아름다움과 공포감을 동시에 느끼게 한다. 그러나 인간은 실제로는 태양을 똑바로 쳐다보지도 못한다. 티끌만 한 지구에서 한껏 잘난 척해 봤자, 별거 아니다. 아, 인생무상.
채지영 기자 yourcat@donga.com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