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L에게
매연과 황사로 찌든 회색빛 하늘을 바라보는 요즘, 오랜만에 모습을 드러낸 햇살이 창가에 들어올 때 지난 신문을 뒤적여 정리하다가 2007년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남우 주연상 후보에 피터 오툴이 오른 것이 새삼 눈에 띄더군. 비록 수상은 ‘라스트 킹’에서 독재자 이디 아민으로 분한 포리스트 휘터커가 했지만 잊혀진 노배우가 아직 살아 있다는 사실을 세상에 알렸기에 난 뿌듯했어. 수년 전 ‘용서받지 못한 자’에서 조연으로 나온 리처드 해리스를 보고 느꼈던 반가움 이상의 무엇이었지.
초등학교 시절을 전후로 흑백과 컬러 TV를 모두 경험했고, 중학생 시절 모든 영화는 불법 복제 비디오로밖에 볼 수 없었지. 고등학교 때 유럽 영화를 보려면 문화원을 가야 했던, 이 모든 것이 우리 시대를 대표할 수 있는 추억거리지만 내가 직접 우리 시대의 네임 태그를 붙인다면 ‘명화 제너레이션’이라고 하면 좋을 것 같아. 1970, 80년대 ‘토요명화’, ‘주말의 명화’, ‘명화극장’ 등 TV영화 트로이카 전성기가 기억나지 않니. 월요일 학교에 와서 친한 친구끼리 모여 전날 본 영화 이야기를 했던 풍경이 그립군. 그땐 영화를 매개로 세대를 불문하고 소통이 자유로웠어. 사실 그렇지, TV 메커니즘이 아니었으면 우리 부모 세대의 1950, 60년대 배우를 우리가 어떻게 알겠니. 하지만 요즘은 많이 달라졌지. 내 수업을 듣는 학생들에게 옛 배우(뭐 그다지 옛 배우들은 아니지만) 이야기를 하면 전혀 모르더군.
무엇이 문제일까. 그래서 난 재작년부터 학생들에게 수업시간에 영화를 보여 주고 있어. 영화를 집에서 볼 수 있게 빌려 주기도 하고. 학기가 끝날 즈음이면 몇몇 학생은 지난 영화의 흔적에 대해 관심을 갖더군. 영화 보고 영화에 대해 이야기하고… 이런 관계가 좋지 않니?
영화를 보여 주며 최근 다시 손에 들게 된 책들이 있어서 너에게 소개해 주려고 해. ‘나의 인생은 영화관에서 시작되었다’(한길사). 이 책은 영화를 지극히 개인적인 관점에서 풀어낸 시오노 나나미의 수필집이야. 예전에 ‘나의 친구 마키아벨리’라는 그녀의 책을 읽은 적이 있는데, 부드럽게 자신의 주변 삶의 이야기에서 시작해 영화 이야기로 오버랩되는 그녀의 필력에 존경을 금치 못했지. ‘죽기 전에 꼭 봐야 할 영화 1001편’(마로니에북스)은 영화의 탄생부터 최근 영화에 이르기까지 연대기적으로 총망라한 일종의 영화 백과사전이야. 예술, 디자인 서적으로 유명한 독일의 ‘타센’ 출판사의 명성에 걸맞은 편집디자인과 수준 높은 사진 디테일은 영화 마니아뿐 아니라 시각예술, 문화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충분히 만족할 만한 컬렉션 북이야.
‘위대한 영화’(을유문화사)도 빼놓을 수 없지. 앞의 책이 많은 영화를 보여 주는 강점이 있다면 이 책은 영화평론가 로저 에버트의 주관적 영화 연보라고 할 수 있겠다. 혹시 우리 어릴 적 ‘사랑방중계’라는 프로그램에서 사회를 보던 영화평론가 정영일 님이 기억나니? 영화를 간간이 소개해 주던 그분의 모습에서 어렴풋이 평론가의 ‘아우라’를 느끼던 시절이 엊그제 같은데 이제는 외국 평론가의 책을 쉽게 접할 수 있는 시간에 살고 있구나.
난 요즘 DVD를 열심히 모으고 있다. 나중에 자식을 낳으면 같이 볼 그날을 위해. 내 아이가 영화를 싫어할지도 모르지만 내가 영화를 통해 엄마의 시대를 알았던 것처럼 내 아이도 그렇게 해 주길. 또 너의 아이가 그러길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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