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자년 12월 청의 10만 대군이 조선으로 진격해 왔다. 인조는 강화도로 몽진하려 했지만, 청군이 길을 끊어 놨다. 고립무원, 남한산성으로 들 수밖에 없었다. 남한산성은 ‘치욕’이라는 단어와 등가다. 47일 만에 성에서 나와 인조가 한 일은 삼전도에서 청 태종에게 머리를 조아린 것이었다.
김훈(59) 씨가 새 장편 ‘남한산성’을 냈다. 병자호란을 맞아 어가가 남한산성에 들어갔다 나오기까지의 역사를 소설화한 것이다. 충무공의 삶을 담은 ‘칼의 노래’, 가야 악사 우륵의 이야기 ‘현의 노래’에 이은 세 번째 역사소설이다.
소설의 서사는 작가가 밝힌 대로다. “글 읽는 자들은 갇힌 성 안에서 싸우고 또 싸웠고, 말(言)들이 창궐해서 주린 성에 넘쳤다.” 움직임은 없고 말만 흘러넘치는 공간. 하루는 죽기까지 청과 싸우자는 말이, 또 하루는 살기 위해서 청에 투항해야 한다는 말이 솟았다. 결사항쟁을 주장한 척화파 김상헌. 화친의 길을 통해 삶을 지속하는 게 우선이라는 최명길. 너무나 잘 알려진 역사 속 인물들의 육성을 작가는 아름답고 비장하게 전한다.
―상헌의 말은 지극히 의로우나 그것은 말일 뿐입니다. 갇힌 성 안에서 어찌 말의 길을 따라가오리까.
―전하, 명길은 삶을 죽음과 뒤섞어 삶을 욕되게 하는 자이옵니다. 신은 가벼운 죽음으로 무거운 삶을 지탱하려 하옵니다.
김훈 특유의 미문은 이제 낯설지 않지만, ‘남한산성’에서 그 화려한 문장은 소설을 장식하는 문체의 역할 이상이다. 병자년 겨울 남한산성은 오직 말밖에 없었던 곳이었으며, 그래서 고뇌스럽기도 하지만, 혐오스럽게도 읽힌다. 그것은 말의 향연에 누구보다 능한 작가가 스스로를 어떻게 성찰하는지 설핏 생각해 보게 한다. 주전파의 ‘실천 불가능한 정의’와 주화파의 ‘실천 가능한 치욕’의 대립은, 어떻게든 살아야겠다는 생각에, 누군가 쓰지 않으면 끌려간 동료들이 맞아 죽으리라는 생각에, 신군부에 대한 용비어천가를 맡아 쓴 작가의 개인사와 묘하게도 겹쳐진다. 그럴 때 이 책은 역사를 통해 스스로를 들여다본(혹은 스스로를 통해 역사를 들여다본) 거울 같은 소설로도 읽힌다. “나는 아무 편도 아니다”라는 작가의 말과 똑같은 말을, 소설 속 수어사 이시백이 한다. “나는 아무 쪽도 아니오. 나는 다만 다가오는 적을 잡는 초병이오.” 그러나 김 씨는 “나는 이시백과 같다”고 하는 대신 “이시백처럼 되고 싶다”고 한다. 김 씨는 어느 쪽인가 하면, 삶이란 치욕과 굴종을 견디는 일임을 일찍이 알아버린 사람이다.
한편으로 모든 역사소설은 그것이 쓰이는 시대에 대한 반성적 질문을 던짐으로써 의미를 갖는다. 남한산성의 치욕의 역사는 현대에 어떻게 읽혀질 수 있을까. 주전파와 주화파의 반목은 명분과 실리 간의 갈등이다. 병자년 남한산성은 그때껏 가치관이고 세계관이었던 ‘명분’과, 그때껏 입에 차마 올릴 수도 없었던 ‘실리’가 똑같은 무게로 저울질되기 시작한 사건이다. 병자호란을 계기로 ‘꼬인’ 명분과 실리의 대치는 개항부터 최근의 자유무역협정(FTA) 협상에 이르기까지 ‘밖에서 싸우기보다 안에서 싸우기가 더욱 모진’ 문제였다. 한국 근현대사 전체를 관통하는 중요한 문제를 정면으로 다뤘다는 데서 ‘남한산성’은 문제작이다.
김지영 기자 kimj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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