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장은 ‘초기 진입자’들에게 냉혹했다.
좌판을 깔기 위해 해저대탐험 블록 등을 내려놓자마자 한 아주머니가 접근했다.
“얘, 이거 2000원에 팔 거니?” 붙어 있던 가격표를 재빠르게 훑어 본 아주머니의 말이다.
“아직 시작을 안 했어요. 나중에 오시면 안 될까요?” 좌판을 정리하던 인석이 말했다.
“그럼 내가 미리 돈을 주고 갈 테니 장사 시작하면 나한테 넘겨.” 어른 손님은 집요했다.
“지금 정신이 없어서 그러는데요, 그냥 조금만 있다가 오세요.”
아주머니는 인석의 손에 돈을 강제로 쥐어 주다시피 하고는 “조금 있다가 올게”라며 사라졌다.
첫 고객의 집요함을 이해하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많은 사람이 그 장난감 블록에 관심을 보였다. 꼬마와 함께 온 아저씨는 1만 원, 옆에서 장사를 하던 아주머니는 8000원에 팔라고 했다. 1만5000원을 제시하는 손님도 있었다.
잡지와 자연관찰 비디오테이프, 수저 살균소독기 등을 펼쳐 놓던 인석과 승록은 난감했다. 옆에서 인형과 옷, 머리끈, 손가방 등을 배열하던 민지와 은경도 당황하기는 마찬가지. 1000원이란 가격이 붙어 있던 연노랑 손가방을 집어 들며 관심을 보이는 사람이 많았기 때문이다.
은경이 재빠르게 말했다. “가격을 정하는 중이라 아직 못 팔아요.” 그 가방은 누가 봐도 새 가방이었다.
○ 가격 재산정
“우리가 값을 너무 싸게 정한 것 같아.”
“그래, 새로 정하자.”
물건 지키는 당번을 정해 두고 번갈아 가며 주변 가격 조사에 나섰다. 자신들이 미리 붙여 온 가격은 전반적으로 너무 싸다는 결론이 나왔다.
민지와 은경은 당초 1000원으로 매겼던 연노랑 손가방의 가격을 7000원으로 크게 높였다. 청바지 값은 1000원에서 2000원으로 올렸다.
인석과 승록은 ‘해저대탐험 블록은 적어도 8000원은 받을 수 있었다’며 아쉬워했다. 수저 살균소독기 가격은 1000원에서 3000원으로 올렸다.
이날 ‘1일 경제교사’로 나선 조영관(40·LG카드 차장) 씨는 “소비자로만 살아온 아이들이 공급자 역할을 해보면 가격이 정해지는 조건(수요와 공급)을 몸으로 느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조 씨는 어린이 경제교육 동화 ‘씽아의 생생 경제 탐험’ 등을 공동 집필했다.
민지가 말했다. “손가방은 삼촌이 선물로 주신 것이어서 처음에는 1000원만 받으려고 했어요. 저한테는 공짜로 생긴 물건이니까요.” 원가(原價)주의 산정 방식이다.
장난감 블록을 ‘강제 예약’한 아주머니가 왔다. 인석은 협상을 했다. 큰 목소리로 2000원만 고집하는 아주머니에게 ‘가격의 불공정함’을 얘기했고 결국 서로 양보해 4000원에 합의했다. 가격은 협상을 통해 바뀔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까.
○ 초등생의 경제 생각
물건을 사면서 돈을 내는 이유를 물었을 때 “물건하고 바꾸는 거예요”, “물건의 가치만큼 돈을 줘요” 같은 답변을 한다면 교환에 대한 개념이 자리를 잡은 것이다. 인석도 “물건의 가치 때문”이라고 답했다.
반면 제대로 추론을 하지 못하는 저학년 아동들은 “값이 매겨져 있으니까요”, “돈을 내야 하니까요”와 같은 동어반복적인 답변에 그친다.
“일부 초등학생은 수렵·채집 시대의 경제 모형을 갖고 있기도 하다. 돈은 은행에 있고, 필요한 물건이 있으면 빨리 가서 사오기만 하면 된다는 식이다.” 경제교육 전문업체인 아이빛연구소 고세영 교육팀장의 경험담이다.
경인교대 사회교육과 한진수(경제교육) 교수는 “아이들의 경제 개념에 대한 인식은 기본적으로 인지발달 이론을 따른다”고 말했다.
인지 능력이 발달한 고학년은 직접적인 체험과 외부 정보를 이용한 교육이 모두 가능하다. 저학년에게는 체험 위주의 교육으로 미래 경제교육을 위한 바탕을 마련해 주는 것이 최선이다. 예컨대 슈퍼에서 아이가 직접 돈을 내고 과자를 받도록 해 경제생활을 체험시키는 것이다.
한 교수는 “초등학교 고학년이라고 하더라도 경제 시스템 전반에 대한 개념은 약하다”며 “아이가 경험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합리적인 소비’와 ‘소득’을 가르쳐도 충분하다”고 말했다.
○ 소비와 나눔
주인공 4명을 상대로 한 설문에서 경제 교육의 효과는 묻어났다. 승록은 용돈을 받는 방식을 묻는 질문에 “설거지 등을 해서 내가 번다”고 답했다. 은경은 ‘꼭 사고 싶은 물건이 있으면 어떻게 하는가’라는 질문에 “부모님 일을 도와드리고 그 대가로 사 달라고 한다”고 했다. ‘일의 가치가 소득’이라는 사실을 체험을 통해 익힌 것이다.
벼룩시장에서 번 돈으로 갖고 싶은 것을 사기로 했다. 3명이 휴대전화를 1순위로 꼽았다. 그러나 벼룩시장에서는 찾지 못했다. 인석은 2순위로 인라인스케이트를 원했지만 역시 그날 벼룩시장에는 없었다. 이럴 때 부모는 ‘희소성’에 대해 가르쳐 줄 수 있다. 희소성은 가격에도 영향을 미친다는 설명과 함께.
사고 싶은 물건을 선택하는 기준에 대해 4명은 ‘가격과 품질’ ‘튼튼한 것’ ‘꼭 필요한 것’이라고 답했다. TV 광고가 항상 사실만을 보여 준다고 생각하는지를 묻는 질문에 모두 ‘아니요’라고 답했다. 호락호락하지 않은 소비자들이다.
인근 이마트로 옮겨 가격표가 잔뜩 붙어 있는 진열대를 살폈다. 조영관 씨는 희소성과 광고, 마케팅, 유통단계별 가격 변화 등을 설명했다.
‘이마트에서도 가격을 깎을 수 있을까’라는 질문에 아이들은 “파는 사람이 주인이 아니어서 힘들다”고 답했다. 벼룩시장 체험이 만들어 준 현실적인 답변이다.
“그 대신 여러분이 시간에 쫓겨 마지막에 할인해서 팔고 나왔듯이 마트에서도 여러 가지 이유(식품의 부패 등) 때문에 할인 판매를 별도로 할 수 있다.” 조 씨의 설명이다.
아이들은 이날 자신의 한 달 용돈에 맞먹는 7500∼1만 원의 매출을 올려 흥분했다. 모두가 “다음에 또 왔으면 좋겠다”고 입을 모았다.
매출의 10%가량은 벼룩시장 운영을 주관한 ‘아름다운 가게’에 기부했다. 하루 종일 돌멩이를 깨뜨리는 등 중노동에 시달리는 다른 나라 아이들에게 도움이 된다는 얘기에 뿌듯해했다. 시작은 냉혹했지만 끝은 따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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