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장영희]골목길, 친구들 그리고 세상

  • 입력 2007년 4월 27일 03시 02분


초등학교 때 우리 집은 서울 동대문구 제기동에 있는 작은 한옥이었다. 골목 안에는 고만고만한 한옥 네 채가 서로 마주 보고 있었다. 그때만 해도 한 집에 아이가 너덧은 됐으므로 골목길 안에만도 초등학교 다니는 아이가 줄잡아 10명이 넘었다. 학교가 파할 때쯤 되면 골목은 시끌벅적, 아이들의 놀이터가 됐다.

어머니는 내가 집에서 책만 읽는 걸 싫어하셨다. 방과 후 골목길에 아이들이 모일 때쯤이면 어머니는 대문 앞 계단에 작은 방석을 깔고 나를 거기에 앉혀 놓으셨다. 아이들이 노는 걸 구경이라도 하라는 뜻이었다.

딱히 놀이기구가 없던 그때, 친구들은 대부분 술래잡기 공기놀이 말타기 고무줄놀이를 하고 놀았지만 나는 공기놀이 외에는 어떤 놀이에도 참여할 수 없었다. 하지만 친구들은 나를 위해 꼭 뭔가 역할을 만들어 줬다. 고무줄놀이나 달리기를 하면 내게 심판을 시키고 신발주머니와 책가방을 맡겼다. 그뿐인가. 술래잡기를 할 때는 한곳에 앉아 있어야 하는 내가 답답해할까 봐 어디에 숨을지 미리 말해 주고 숨는 친구도 있었다.

세상 향해 마음 열게 해 준 친구들

우리 집은 골목에서 중앙이 아니라 모퉁이 쪽이었는데 내가 앉아 있는 계단 앞이 친구들의 놀이 무대였다. 놀이에 참여하지 못해도 난 전혀 소외감이나 박탈감을 느끼지 않았다. 아니, 지금 생각하면 아마도 내가 소외감을 느낄까 봐 친구들이 했던 배려였다.

골목길에서의 일이다. 초등학교 1학년 때였던 것 같다. 하루는 우리 반이 좀 일찍 끝나서 혼자 집 앞에 앉아 있었다. 마침 골목길을 지나던 깨엿장수가 있었다. 아저씨는 가위만 쩔렁이며 내 앞을 지나더니 다시 돌아와 깨엿 두 개를 내밀었다. 그 순간 아저씨와 내 눈이 마주쳤다. 아저씨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아주 잠깐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했다. “괜찮아.”

무엇이 괜찮다는 건지 모른다. 돈 없이 깨엿을 공짜로 받아도 괜찮다는 뜻인지, 아니면 목발을 짚고 살아도 괜찮다는 말인지…. 하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내가 그날 마음을 정했다는 것이다. 이 세상은 그런대로 살 만한 곳이라고, 좋은 사람이 있고 선의와 사랑이 있고, ‘괜찮아’라는 말처럼 용서와 너그러움이 있는 곳이라고 믿기 시작했다.

어느 방송 채널에 오래전 학교 친구를 찾는 프로그램이 있다. 한번은 가수 김현철이 나와서 초등학교 때 친구를 찾아 함께 축구하던 이야기를 했다. 한 친구가 말했다. 당시 자기 허리가 36인치일 정도로 뚱뚱해서 잘 뛰지 못한다고 다른 친구들이 축구팀에 넣어 줄 수 없다고 했다. 그때 김현철이 나서서 말했다. “그럼 얜 골키퍼를 하면 함께 놀 수 있잖아!” 그래서 친구는 골키퍼를 맡아 함께 축구를 했다. 그는 몇십 년이 지난 후에도 김현철의 따뜻한 말과 마음을 그대로 기억하고 있었다.

시각장애인이면서 재벌 사업가로 알려진 미국의 톰 설리번은 자기의 인생을 바꾼 말은 딱 세 단어, “Want to play(함께 놀래)?”라고 했다. 어렸을 때 실명하고 절망과 좌절감에 빠져 고립된 생활을 할 때 옆집에 새로 이사 온 아이가 그렇게 말했다고 한다. 그 말이야말로 자기가 다시 세상 밖으로 나올 수 있는 계기가 됐다고 했다.

후회해도 늦어 버린 美총격사건

어린아이의 마음은 스펀지같이 무엇이든 흡수한다. 그리고 어느 순간에 마음을 정해 버린다. 기준은 ‘함께’이다. 세상이 친구가 되어 ‘함께’하리라는 약속을 볼 때 세상은 힘들지만 그런대로 살 만한 곳이라든지, 아니면 세상은 너무 무서운 곳이라든지 결정해 버린다. 새삼 생각해 보면 내가 이 세상에 정붙이게 만들어 준 것은 바로 옛날 나와 함께하기를 거절하지 않은 골목길 친구들이다.

조승희의 죽음에 같은 학교의 한 여학생이 남긴 노트에는 “우리의 이기심이 널 분노하게 했을지 모르겠다. 함께 친구가 되어 주지 못해서 미안해”라고 적혀 있었다고 한다. 후회는 아무리 빨리 해도 이미 늦다.

장영희 서강대 교수·영문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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