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아침에 만나는 시]곽효환 ‘뒷산에서 길을 잃다’

  • 입력 2007년 4월 27일 03시 0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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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산에서 길을 잃다 - 곽효환

우습지 않은가

뒷산에서 길을 잃다니

눈 아래로 낯익은 얼굴들이 빤히 보이는데

한 달에 몇 번씩 오르는 뒷산에서

물통을 두고 온 약수터를 찾지 못해

두 시간씩 세 시간씩 오르내리는 꼴이라니

더 우스운 사실은

그곳에서 만난 사람 누구도

길을 모르더라는 사실이지

- 그냥 길을 따라 걷고 있을 뿐이더라구

약수터에 두고 온 때 낀 물통만 아니었다면

그들처럼 그냥 길을 따라 걸으련만

차마 손 타고 물때 낀 물통을 포기할 순 없더군

자네도 길을 잃어보게

뒷산에서 길을 잃었다고 말할 수 있는지

약수터에 두고 온 물통을 포기할 수 있는지

우습지 않은가

뒷산에서 길을 잃다니

- 시집 '인디오 여인'(민음사) 중에서

낯선 곳에서 길을 잃는 것은 길을 잃는 것이 아니다. 모르는 길을 어떻게 잃을 수 있는가. 가장 두려운 것은 ‘아는 길을 잃는 것’이다. 아니, ‘안다고 착각하던 길’을 잃는 것이다. 나는 지금 내가 가는 길의 의미를 진정으로 아는가? 혹시 관성으로 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관성으로 일어나고, 관성으로 출근하고, 관성으로 퇴근하고, 관성으로 숨 쉬고 있는 것은 아닌가? 누구라도 어느 날 문득 뒷산에서, 앞산에서, 아니 제 집에서 길을 잃을 수 있다. 그러나 길을 잃을수록 자신이 또렷이 보이는 법이니 길을 잃고 자신을 찾을 것인가, 자신을 잃고 관성의 길을 갈 것인가.―시인 반칠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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