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오명철]책과의 이별

  • 입력 2007년 5월 3일 03시 02분


장서라고 할 수준은 아니지만 한때 5000여 권의 책을 갖고 있었다. 물론 이 책을 다 읽었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야말로 대단한 장서가였던 고교 시절 국어선생님의 영향으로 10대 중반부터 한 권 두 권 모으기 시작한 책이 대학시절 2000여 권에 이르더니, 신문사에 들어와 문화부 기자로 일하면서 5000여 권으로 늘어난 것이다.

젊은 시절 재산목록 1호

젊어서는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틈날 때마다 헌책방에 들러 책을 구입했다. 교통비마저 털어 넣어 ‘희귀본’을 구입했을 때는 먼 길을 걸어오면서도 피곤한 줄 몰랐다. 어쩌다 저자 친필 서명본을 손에 넣게 됐을 때는 마치 저자를 직접 대한 듯 기뻤다. 가난했지만 벽돌에 널빤지를 얹거나 조립식 철제 서가에 가지런히 꽂혀 있는 책을 보는 것만으로도 부자라고 생각했다.

수시로 이사를 다니면서도 어떻게든 책만은 챙겼다. 나로서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재산목록 1호였다. 사회과학도였지만 세상을 바꾸는 책보다는 긍정적이고 따뜻한 시선으로 세상을 보는 책을 많이 읽었다. 명절이면 한복으로 갈아입고 시조집을 낭랑하게 읽어 내리는 호사를 부리기도 했다. 훗날 내 집을 갖게 되면 제대로 된 서재를 꾸려 안락의자에 앉아 책을 읽겠다는 소망도 품고 있었다.

언론인이 된 후에는 저자나 출판사가 보내 준 책들이 주종이 됐다. 아무래도 내 돈으로 직접 책을 사는 것보다는 애정이 덜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공력이 담긴 책은 저자의 노고를 생각해 서문이라도 읽었다. 저자가 친필 사인을 적어 보내 준 책은 더욱 소중하게 대했다. 내가 기사로 쓴 책이 베스트셀러 목록에 들어설 때는 뿌듯한 마음이 들곤 했다. 어쩌다 서가에서 고교나 대학시절 읽은 책을 뒤적이면서 밑줄이 그어진 대목을 읽을 때에는 ‘지금 읽어도 잘 모르겠는데 이 어려운 대목을 어떻게 이해했을까’ 하며 스스로 대견해하곤 했다. 감수성은 때로 지성을 능가하는 것 같다.

40대에 내 집을 마련하긴 했지만 서재를 꾸미진 못했다. 안방과 베란다에 분산해 책을 나눠 놓으니 책에 대한 애정도 반으로 나뉘는 듯했다. 특히 베란다에 처박힌 헌책들은 잊혀진 여인처럼 내 손길에서 멀어져 가기 시작했다. 직업적 특성이라고는 하지만 책보다는 신문과 TV 뉴스를 보는 시간이 훨씬 더 늘어났다. 그러면서도 언젠가 넓은 집으로 옮겨가 양지바른 쪽에 서재를 만들어 놓고 클래식 음악을 들으며 독서로 여생을 보내겠다는 소망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50대에 뜻하지 않게 이사를 하면서 이 꿈마저 포기해야 했다. 집을 넓혀서 이사를 갈 형편이 못되다 보니 이삿짐에서 가장 많은 부피를 차지하는 책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어차피 인생에 두세 번 읽는 책이 몇 권이나 되느냐. 공연히 집착하지 말고 놓아버리라”는 선배의 말씀도 가슴에 와 닿았다.

‘나눔’이 책에 대한 진정한 예의

고민 끝에 전공 관련 도서를 비롯해 절반을 모교 출신학과에 보냈다. “언론인이 되기로 마음먹은 한 젊은이가 30년가량 읽고 간직해 온 책이니 후배들에게 언론에 대한 영감이라도 심어 주었으면 좋겠다”는 당부와 함께. 책을 모교에 보내면서 오랜 연인과 헤어지듯 말로 다할 수 없는 허전함을 느꼈다. 최근 몇 년 사이 관심을 갖고 모은 수백 권은 평소 잘 아는 선배가 경영하는 출판사로 보냈다. 선배는 수시로 와서 둘러보고, 필요할 때는 언제든 가져가도 좋다고 배려해 주었다. 그래서인지 이곳에 보낸 책들은 시집간 딸 같은 느낌이 든다.

그래도 아직 집과 사무실에 1000여 권의 책이 있다. 주로 내 인생과 글쓰기에 영향을 주신 분들의 저서와 친필 사인이 담긴 책들이다. 이 책들과는 정말 헤어지고 싶지 않다. 요즘은 책을 서가에 두기보다는 그 책을 나보다 더 필요로 하는 ‘임자’들을 찾아주는 데 관심을 쏟고 있다. 그것이 책에 대한 진정한 예의라고 생각해서다.

오명철 편집국 부국장 oscar@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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